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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31 18:39 수정 : 2007.10.31 18:50

문근찬/한국싸이버대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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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이코노믹 맨) 개념은 개인이나 개별 기업이 열심히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는 것으로, 현대 시장경제의 원리를 잘 대변하고 있다. 250여년 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경제행위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고 함으로써 경제인의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 역사에서 보듯 경제인 개념은 만능이 아니었다. 이로써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대형 기업체들이 생겨난 데까지는 고금에 없는 역사적 성과였지만, 그 부작용으로 노동자들이 소외되었다. 여기서 ‘소외’란 말은 같은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태, 곧 노예 상태를 조금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경제적 발전이 자동적으로 자유와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 반작용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나왔다. 더불어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로 돌변해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유럽 근대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기능하는 사회’란, 첫째, 국가는 구성원이 나름의 몫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둘째,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존엄성 내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당시 유럽 사회의 소외된 노동자들은 자신을 노예화하는 사회를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의 두 요소가 동시에 만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 또는 성장 없이 평등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결코 건강한 사회는 아니다. 그리고 건강하지 않은 사회는 오래갈 수 없다. 한마디로, 이 둘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는 전일적 요소라고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유럽 사회가 겪었던 대규모 시민혁명이나 전체주의 혁명 같은 것을 겪지 않았지만, 지난 10여년 ‘성장이냐, 분배냐’,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 ‘시장경제냐, 규제냐’ 같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과거 유럽 나라들이 겪었던 전체주의 망령에 비하면, 이 정도 갈등은 큰 병을 막기 위한 예방접종 후의 미열과도 같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미열은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라는 말이 있다. 걷도록 태어난 사람에게 난다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차원을 달리볼 줄 아는 ‘패러다임 전환’을 말한다. 앞서 ‘기능하는 사회’의 요건을 볼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지난 세월의 이분법적인 논의가 아니라, 양극단의 관점을 아우르는 전일적인 사고와 비전을 가져야 함을 요구한다.

예컨대, 성장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이 제 몫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서 받는 박탈감을 치유하는 일에 ‘성장’ 못잖은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식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양자 택일’ 논리가 아닌 ‘함께’ 논리를 요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동 번영, 시장경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시 발전, 자본과 노동의 상생 커뮤니티 같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혹자는 이상론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건대, 이런 생각을 시민 두루 공유하면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할 때는 전체주의를 거쳐 몰락하는 사회로 가는 것을 보았다. 피터 드러커 박사가 60여년 전에 저술한 <경제인의 종말>이 이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야 할 때다.


문근찬/한국싸이버대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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