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11 18:14
수정 : 2007.12.1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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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일차의료연구회장·가톨릭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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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2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3.3배나 된다.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운전자의 과실인지, 아니면 보행자의 과실인지를 가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비좁은 도로사정, 모호한 차선, 부적절한 표지판 등에 기인하는 사고임에도 억울하게 차량운전자나 보행자에게만 책임이 전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 의약품 사용량이 지나치게 높음을 지적하면서 의약품 과다사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동일 병원에서 진료과목이 다르기 때문에 상호 투약하거나 환자의 남은 약을 고려하지 않고 처방하면 건강보험 적용을 제한한다는 것, 환자가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중복처방 받을 경우 그 약제비를 환수한다는 것, 처방받은 약을 재판매 하는 경우 형사고발하겠다는 것, 그리고 의료기관이 스스로 약제비를 절감한 경우 인센티브를 부여한다는 것 등이다. 정부의 이런 대책은 의약품 중복투여나 과다사용의 책임을 선량한 시민들에게만 지우는 것 같아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2005년)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료비 대비 의약품 지출 비율은 27.3%로 3위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인 17.4%를 훨씬 웃돈다. 반면,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주치의제도가 발달한 선진국들의 경우 8.9∼12%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선진국은 10%대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지표들을 국제비교 할 때 양극단에 위치하는 항목은 의약품 사용량뿐만이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보건의료비 비중은 25개국 중 꼴찌(6.0%)이면서도 인구 대비 컴퓨터 단층촬영장치(CT) 보유 수는 세계 1위이며, 그 밖에도 최근에 1위 자리를 내어 준 제왕절개 분만비율 3위, 국민 1인당 1년간 의사방문 횟수 3위, 인구 대비 급성질환 치료병상 수 2위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모습에 불과하다. 수면 밑에 깊게 박혀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대책은, 수면 위 빙산에 대한 실효성 없는 미시적 대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구조적인 모순은 첫째는, 공공의료가 매우 취약하며, 얼마 되지 않는 공공기관마저 ‘공공성’이 결여된 채 운영되는 점이다.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민간보험을 도입하는 등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의료산업화 기조는 ‘공공성’을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 둘째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아직 취약해 사회안전망으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주치의제도가 없어서 보건의료체계의 기반인 일차의료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주치의가 조정해주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의료서비스의 과용과 남용을 제어할 수 없게 되며, 행위별 수가제 때문에 과다 의료행위가 조장된다. 우리나라 보건통계 지표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표준에서 동떨어져 있는 상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치의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약을 많이 사용하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시민 개개인의 잘못된 행태 때문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당근과 채찍만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알량한 기대를 버려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보건의료체계의 기반이 될 ‘주치의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아울러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이를 관철해야 한다.
이재호/일차의료연구회장·가톨릭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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