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12.21 19:20 수정 : 2008.01.02 10:39

그레고리 커터니어스/전 하버드 의대 강의병원 교수

기고

하버드는 훌륭한 대학이다. 그러나 과연 가장 훌륭한 대학인가? 부모들이 강요하는 희생에 값할 만큼 훌륭한가?

먼저 나는 훌륭한 교육의 중요성을 확고히 믿는 사람임을 분명히 해둔다. 이 믿음은 이민 세대인 나의 조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이기고 대공황 시기의 궁핍을 견디며 2차대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최상의 교육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부모든 자식을 ‘하버드’로 수렴되는 최고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보편적인 꿈을 갖고 산다. 교외 부유층이든 대도시 슬럼가의 가난한 집안이든 이민 가정이든 한국의 조기 유학생이든 그것을 향해 내달린다. 이토록 갈망하는 하버드에 관한 신화 혹은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학교 순위’라는 것의 근거를 따져보자. 학생들이 특정 학교를 최고로 꼽는 이유는 무엇인가? 놀랍고도 한심하게도 “그 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우니까”가 그 대답이다. 그러나 몇 해 전 퓨재단 연구소에서 교육의 질을 다섯 가지로 나눠 평가한 조사를 보면, 아이비리그 대학 중 단 한 곳도 가장 우수한 학교의 명단에 끼지 못했다. 반면 어느 대학에서 가장 훌륭한 교수들에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좋은 교수에게 배울 확률은 학교의 이름과 무관하다. 덜 유명한 소규모 대학에서 차라리 하버드에서보다 훌륭한 교수의 직접 지도를 받을 기회가 더 많다.

많은 이들이 하버드나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오는 것이 사회 진출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 주요 기업의 간부들을 상대로 한 최근 조사는 그들 중 다수가 훨씬 덜 유명한 대학 출신임을 입증한다. 정치가나 예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교수직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하버드의 학위는 더는 교수직도 보장하지 않는다. 학생 자신들도 점차 하버드만이 최상의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최근 하버드에 합격하고도 다른 대학을 선택한 “용감한” 젊은이들 얘기를 보도하고 있다.

현실은 이러한데도 부모들이 기어코 하버드에 보내야겠다고 자식들에게 압력을 주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과연 누구를 위한 압력인가? 중상류층 가정에서 이 압력은 광적인 경지에 이르러 탁아소조차 하버드를 염두에 두고 고르는 판국이라고 한다. 또한 단지 자식이 하버드에 입학할 확률을 높이려고 온 가족이 이사를 하는 진풍경도 보인다. 어떤 부모들은 ‘진학 코치’에게 수천 달러를 주면서까지 자식들의 지원서 작성을 대행하게 한다.

훌륭한 교육은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교육환경에서 이뤄진다. 배움은 어린시절 성장과정의 일부로써 서둘러서도 지체되어서도 안 된다. 다섯 살짜리 아이는, 외국어 배우기나 구구단 외우기보다 상상적인 놀이를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환상과 상상의 놀이를 통해 차근 삶의 단계를 밟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만으로 보람된 일이다. 예술적 감수성과 지적인 창조성,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키워주는 것이 자녀들의 미래를 준비해 주는 일이다. 과연 부모가 하버드에 대한 자신의 환상을 채우려 자식의 자연스런 성장 과정을 막을 자격이 있는가?

자녀들이 교육의 과당경쟁 밖으로 나오도록 이끄는 일은 많은 용기와 신념이 필요하다.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식들이 다닌 대학의 지명도에 의존하지 않을 용기와 자식들이 하버드라는 이름에 상관없이 각자의 개성에 맞는 교육을 추구할 때에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 말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는 이처럼 자식들을 신뢰할 의무, 곧 자식들에게 어린 시절을 보장해줄 의무가 있다.

그레고리 커터니어스/전 하버드 의대 강의병원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기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