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2.03 19:31
수정 : 2008.02.04 10:32
|
최완규/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일본 게이오대학 방문교수
|
기고
‘혹시’ 했는데 ‘역시’인 것 같다. 요즈음 정확해야 할 일기예보는 잘 맞지 않는데 비해 좀 틀렸으면 하고 기대했던 예측 하나만은 너무 잘 맞는 것 같아 걱정이다. 5년마다 반복되는 정권인수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임 정부와의 ‘차별화하기’ 내지 ‘단절하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울 지경이다. 한 때 기세 등등하게 등장했던 김영삼 정부의 ‘신 한국의 창조’와 김대중 정부의 ‘제 2의 건국’이라는 슬로건은 지금 그 그림자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워 온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나 ‘국가의 균형발전’이라는 슬로건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슬로건들은 현실 정합성보다는 전임정부와의 차별성을 유달리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새 정부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이 주도한 차별과 단절의 정도만큼 후임자들에 의해 가혹하게 부정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어야 하는가.
이명박 정부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물론 10년 만에 되찾은 정권이니만큼 버리고 바꾸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꼭 전임정부를 폄하하면서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단절을 강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연속성을 강조하면서도 얼마든지 변화와 개혁을 해 나갈 수 있다. 특히 별다른 묘책이 있을 수 없는 대북정책까지 전임정부의 정책과 완전하게 단절할 필요는 없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공약 내용도 조건과 수단은 다르지만 전임정부의 정책 목표(화해협력의 활성화와 한반도평화체제 수립 등)와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의 주무부서인 통일부를 외교부에 통합시키는 조직개편까지 단행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인수위원회의 공식 설명대로라면 외교와 통일의 연계로 “시너지 효과를 도모”하기 위해서 두 부서의 통합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햇볕정책’과 그 정책 추진을 선도해 온 통일부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평가가 짙게 깔려 있다.
그 동안 ‘햇볕정책’은 남북간의 교류협력사업을 활성화시키고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적지않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상정하고 있는 몇 가지 가정과 추진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우선주의에 경도된 대북인식과 일방주의적 유화정책 및 대북 저자세 , 그리고 전임정부 정책과의 차별성을 유달리 강조하면서 단 시일 내에 큰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업적주의 등은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온건한 중도노선을 견지해 온 일반 국민들로부터도 비판적 평가를 받아 왔다.
아직도 북한은 우리에게 이중적 인식의 대상이다. 국가(안보)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북한은 포용과 협력보다는 갈등과 대결의 대상이다. 민족중심차원의 시각에서 보면 갈등보다는 그래도 포용과 협력의 대상이다. 작금의 남북관계 상황은 어느 한쪽 시각으로 북한을 인식하거나 두 시각을 절충해서 북한을 평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한관계를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다소 애매하게 규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김대중, 노무현정부는 역대 정부와 달리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국가주의적 입장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을 민족우선주의적 시각으로 다루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서로 배타적인 두 시각을 애매하게 절충하거나 민족우선주의적 시각을 더 중시한다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국가(안보)주의적 시각에서 움직여야 할 국방부와 외교부 및 국정원을 민족우선주의적 시각에서 북한과 상대하도록 외도를 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당선인과 인수위원회는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통일부가 너무 북한의 눈치를 보고 권한이 비대해져 때로는 월권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통일부가 조직의 성격상 민족우선주의적 입장에서 북한을 상대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둘째, 국가(안보)주의적 입장에서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부서가 정부 정책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마치 통일부가 된 듯한 인상을 준 탓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실상 통일부의 해체를 의미하는 외교부와의 통합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전형이다. 외교부와 통일부의 통합보다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갖는 정부 부서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처를 강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고 외교부나 국방부가 제 위치를 찾게 되면 설사 통일부가 조직의 특성상 민족이익을 위해서 국가이익을 등한시하거나 월권을 하고싶은 유혹을 받아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적어도 대북정책에 관한 한 전임정부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는 선례를 세워야 한다. 만약 새 정부가 전임정부의 대북정책을 본질보다는 정략적 차원에서 과도하게 비판하면서 또 다른 정책을 제시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할 것이다. 집권 5년 내내 지난 10년 간 두 정부가 정책 추진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그대로 떠안게 된다. 그리고 5년 뒤에는 후임정부에 의해 또 다시 자신의 정책이 부정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 또한 5년마다 정책이 달라지는 남한과 진지한 논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연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명박 정부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70년대 후반 이래 한국정부가 구상하고 추진해 온 대북화해 협력의 기본 틀을 계승하고 그 바탕 위에서 대내외적 상황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정책방향과 수단을 수정, 보완해야 할 것이다.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 기본 틀을 형성한 이론적 바탕은 점진적 교류, 협력을 통한 기능적 통합망의 확산을 중시하는 기능주의 통합론이고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의 이론적 기반 또한 동일하다. 따라서 대북화해협력 정책의 큰 얼개 속에 햇볕과 평화번영정책의 성과도 담아낼 수 있다.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대북화해 협력정책을 실천하기 위한 방향설정과 수단방법에 대한 공론화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선거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구상하고 공약한 사안들도 시행에 앞서 다시 한번 그 타당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그 동안 한반도문제를 규정해 온 1953년의 휴전체제는 1991년의 기본합의서 체결과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휴전체제에 기반 한 전통적인 동맹체제를 고집하거나 거기에 안주하는 대북정책은 현실적합성이 없다. 그것은 역으로 아직도 민족모순의 해소를 통한 통일에 매달리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론 공론화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킬 방법을 대북화해협력정책의 틀 속에서 담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지속가능한 정책이 나올 수 있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거와 단절하고 다시 해보려는 인간의 욕심이 인간의 능력을 저하시키고 오랑우탄처럼 실수를 반복하게 한다. 연속성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하나이다”라고 외친 뒤퐁 화이트의 경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최완규/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일본 게이오대학 방문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