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5 20:33
수정 : 2008.09.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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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숙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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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치주의가 요즘 정치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법치주의를 강조하여 일어난 일이다. 민주국가에서 정책 문제가 어찌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공무원에 한정된 일인가. 역사학도인 내 몫은 법치주의의 요소를 역사적으로 짚어보는 일이겠다.
우선 법치주의(rule of law)라는 말의 기원을 살펴보면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 기원을 옥스퍼드대학 법학석좌교수 앨버트 벤 다이시의 1885년 저서 <헌법학 입문>에서 찾는다. 찬양자들은 다이시가 법치주의라는 말을 “주조했다”거나 “마술모자에서 끄집어냈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다이시를 ‘발명자’로 꼽는 더 타당한 근거는 법치주의를 권위 있게 규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헌법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영국 헌법을 세 가지 원리를 축으로 명쾌하게 설명했는데, 법치주의가 그중 하나다. 따라서 다이시의 법치주의 정의는 실제 영국 헌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의회 입법이 법원에서 평등하게 적용되어 공무원에게도 일반법원에서 일반법을 적용하는 현상을 영국 법치주의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이 맥락에서 당시 프랑스의 행정법과 행정법원은 영국의 법치주의와 대조된다고 낮은 평가를 받았다.
100여년 전 다이시의 법치주의 설명을 법리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법학자의 몫으로 넘기고, 역사적 고찰을 계속하면 특기할 만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는 당시 영제국을 세계 최강인 상태로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다이시의 논리와 행동을 압도하였다는 사실이다. 제국주의자의 면모가 두드러진 계기는 <헌법학 입문> 출간 이듬해에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제출한 사건이다. 자유주의자 밀이 “영국인의 수치”라고 묘사했던 아일랜드 지배를 완화하려는 이 법안에 다이시는 즉시 반대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거의 30년간 아일랜드 자치 반대운동에 몰두했다. 1912년 세 번째로 아일랜드 자치법안이 제출되었을 때, 그는 북아일랜드의 영국 합방파와 한편이 되어 자치법이 통과될 경우 선거와 납세를 거부하라고 선동했다. 영국인에게는 “병사와 대포알로 결판내는 전쟁”도 경고했다. 앵글로색슨의 법치주의를 찬양한 인물이 드러낸 믿기 어려운 변신이었다.
더불어 주목할 사실은, 다이시가 집요하게 아일랜드의 자치를 저지하고자 투쟁하면서 영국 헌정의 실제 동향과 점점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귀족원의 거부권을 폐지하고 하원의 최장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한 1911년 의회개혁법을 반대했고, 영국 복지제도의 시발점인 1908년 노령연금법을 “뇌물”이라고 비난했다. 1915년 <헌법학 입문> 제8판에 붙인 새 서론에서는 여성 참정권, 비례대표제, 연방제를 모두 반대하여, 후대의 편집자 중에서는 100쪽에 가까운 이 당혹스런 문건을 아예 빼버리기도 한다.
법치주의 발명자 다이시와 이후 영국 헌정의 민주화 사이에서 보는 괴리는 법치주의 논의에서 초점을 발명자에서 실천가로 옮길 필요성을 제기한다. 원래 다이시의 설명이 당시 영국의 정치행태에 기초했다는 사실도 실천가를 중시해야 하는 강력한 근거다. 영국에서 법치주의 실천가를 지적하자면, 단순 다수결로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있지만 부당한 법을 삼가는 입법부와 그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사법부다.
법치주의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그 발명자와 실천가를 살펴본 역사학도의 눈에는, 대통령이 법치주의를 주창하고 경찰과 검찰 등이 뒤따르는 현재 구도가 매우 걱정스럽다. 법치주의에 관하여 국민의 몫은 대통령에게 나서지 말라고 제지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에 실천가로서 제 몫을 하라고 독려하는 일인 듯싶다.
이태숙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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