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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9 18:07 수정 : 2008.09.19 18:07

김지수 전남대 법대 교수, 동양법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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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종교갈등이 크게 불거지고 있다. 영혼의 믿음 속에서 자기 믿음만이 최고 유일의 절대라고 믿는 건 신앙의 본질 속성상 당연하다. 하지만 믿음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사회성의 제약을 받는다. 개개인의 절대자유가 공존하기 위한 평등원리 때문이다. 황금률과 ‘똘레랑스’라는 관용이 동서고금 모든 규범의 공통원리로서, 사회의 기본약속이다.

종교신앙 조직도 자체 논리 강화를 통해 존립의 독자성을 확보해 간다. 그래서 특정 교리가 두드러지게 항진할 수 있고, 구성원의 신앙심과 결속력을 높이려 극단으로 치달을 위험성도 있다. 이 점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나 흡사한 성격을 지니며, 그 광란의 폐단은 인류역사가 참담하게 증명한다.

최근 일부 종교인의 ‘언동’은 종교 본질을 벗어나, 평화공존을 위협할 우려가 높다. 자기 종교를 믿는 나라는 다 잘살고,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는 모두 못산다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버젓이 강변한다. 지난번 학내 ‘종교간 대화학회’에 온 어느 목사가 주제와 관계없이 그런 말을 불쑥 내뱉기에, 주최자 예의상 용인했다. 근데 나라 밖에서 공개로 떠드는 자가 있다니, 한두 사람의 우발적 실언은 아닌 것 같다.

‘잘살고 못살고’의 기준은 무엇일까? 경제적 강대국인가? ‘일본’은 유일한 예외라나? 그럼 대만이나 싱가포르는? 베이징 올림픽으로 강성대국의 기지개를 켠 중국은 어떤가? 우리나라도 그 종교가 이만큼 발전시켰는가? 김영삼 정부 때 구제금융 위기도 그 당연한 성과인가? 잘사는 선진국의 그 종교는 우리처럼 그렇게 편협한 오만과 독선을 찾기 힘들고, 다문화를 껴안는 관용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또 경제상 부와 행복은 그리 비례하지 않는다. 최빈국인 부탄은 행복지수가 최고라고 한다. ‘부동산 거품’뿐 아니라, 경제 자체도 종교상으론 물거품이나 뜬구름처럼 덧없는 환상이다. ‘육신생명’을 한바탕 봄꿈처럼 허망한 놀음이라고 설파하는 게, 모든 종교의 공통 가르침일진대, 하물며 몸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이야 오죽하랴?

청빈한 삶으로 정신이 부유해야 할 종교 성직자가 돈과 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워, 잘사는 나라를 치켜세우고 종교간 갈등을 조장하는가?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부자한테, “먼저 네가 가진 재산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뿐인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의 시험을 받을 때, 빵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을 모두 단호히 물리치고, 오로지 영혼생명을 내세웠다.

근데 일부 자칭 ‘예수님 제자’라는 분들은 정신이 아닌 물신주의에 젖어, 오로지 신도 수와 교세의 확장을 위해 경전 가르침과 거꾸로 치닫고 있으니, 정녕 말세의 징조인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는, 돈 때문에 스승까지 팔아넘긴 자도 있었다. 지금 ‘예수님 이름’을 팔아 헌금이란 명목으로 황금을 긁어모아 ‘더 많이 더 높이’ 세계적 조직을 자랑하려는 극소수 ‘교직자’들도, 바로 ‘스승 판 제자’의 정통 직계후예일까?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한테 먼저 대접하라!”(Do as you would be done by!)고 했다. 공자님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짓은 남한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다. 이것이 인류사회 모든 규범의 공통 기본원리인 황금률이다. 자기 종교가 존중받고 싶으면 이웃 종교도 존중해야 하고, 자기 신앙이 능멸 당하기 싫으면 남의 신앙도 모멸해선 안 된다. “서로 같은 점은 사랑하고, 서로 다른 점은 존경한다”(愛其所同, 敬其所異)는 관용정신이 다원화한 사회의 평화공존에 절실히 필요하다.


김지수 전남대 법대 교수, 동양법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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