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25 19:16
수정 : 2011.03.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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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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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한림대 명예교수
온 세계의 눈과 귀가 후쿠시마에 고정되어 있다. 원자력발전소가 잘못되면 몇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삼킨 도호쿠 대지진보다 더 참혹한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500명 이상으로 늘어난 결사대의 방사선 피폭을 무릅쓴 사투가 눈물겹다. 세계 최초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또다시 희생당하는 불행은 안 된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한국인 4만명을 포함한 1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피폭자들은 66년이 지난 오늘도 원자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의 개발을 건의한 아인슈타인, 맨해튼계획을 총지휘한 오펜하이머, 수소폭탄의 아버지 사하로프마저 모두 반핵으로 돌아섰다. 50년대 정상급 과학자들이 벌인 반핵운동의 목표는 대기권 핵실험의 중지였다. 방사성 낙진이 인간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링은 이 운동을 평가받아 1962년 평화상도 받았다.
1954년 소련이 시험 삼아 만든 원자력발전소는 영국, 미국으로 퍼져나갔고 70년대 석유위기가 오면서 에너지원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방사능 오염의 위험 때문에 곧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섬(TMI)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된 사고는 큰 충격이었다. 다행히 사고는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오염된 지역에서 암환자와 기형아가 크게 늘어났다.
1986년, 지금은 우크라이나로 들어간 소련 체르노빌에서 방호벽 없는 원자로가 녹아내린 사고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즉각적인 인명피해는 몇천명이었지만 방사선에 오염된 인구는 몇백만명을 넘어섰으며 유럽 전역의 농축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 충격으로 원자력발전은 오랫동안 크게 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기후변화가 갑자기 악화하면서 원자력은 저탄소 청정에너지로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후쿠시마의 비극은 세계 흐름의 반전을 가져왔다. 독일이 원전 재가동을 취소했고, 중국이 원전 건설을 보류했다.
일본의 도카이 1호기보다 12년 늦게 1978년 고리 1호기를 가동한 한국은 21기를 운영하고 있다. 2030년까지 전력의 59%를 원전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에 부풀어 있다. 그동안 한국은 원전 건설 기술을 거의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맹렬히 뛰는 원전 강국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자력발전은 곡절이 많았다. 크고 작은 사고가 적지 않았으며 방사성물질 폐기장을 둘러싸고 홍역을 치렀다. 공해추방운동연합에서 환경운동연합으로 이어진 반핵운동도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2004년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현재는 독립기관)는 원자력문화재단까지 참여시켜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을 주제로 시민합의회의를 열었다. 덴마크에서 시작한 합의회의는 주요 사회문제에 관해 시민들이 전문가들의 집중강의를 듣고 토론한 끝에 결론을 내리는데 합의사항은 정책에 반영된다. 그때 정부의 전력정책을 비판하고 원자력발전소의 신규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합의회의의 결론은 주류 언론의 외면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정부가 무시해 성과가 없었다.
4월17일 환경재단과 환경운동연합이 ‘원자력발전 안전한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고 이튿날 각계인사 77인이 긴급기자회견을 열었다. 결론은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정부는 신재생에너지의 확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에너지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와 국민은 오랫동안 과학에 대한 맹신과 성장만이 지상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무섭게 진행하는 기후변화와 빈발하는 자연재앙은 인간의 겸허와 반성을 강요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만능이 아님을 깨닫고 과학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단순한 지식을 넘어 온갖 지혜를 총동원할 때 인류의 앞날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후쿠시마의 비극이 우리 모두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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