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30 19:31
수정 : 2011.03.3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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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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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국제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맙소사! 국제화시대라서 그런가, 앞부분이 조금 한글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초청장은 영어였고, 함께 보내준 문서인 행사 프로그램도 영어였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 문서 한 장을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개인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인권위는 ‘국가기구’이고 ‘인권’을 다루는 기구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다른 정부기관도 이러지는 않는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인권위는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곳이다. 더구나 한국의 인권위 주최로 여는 행사에, 한국에 있는 인권단체들에 참여 여부를 물으려면 한글로 된 초청장과 그동안의 경과와 문제의식을 담은 한글 문서를 보내는 것이 옳다. 최소한의 친절함도 없었다. 물론 인권위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 인권단체에도 영어로 보내서 차별 없이(?) 하려고 똑같이 영어로 보냈다고….
읽어보니 의제가 ‘유엔 인권조약기구시스템 강화와 관련된 시민단체 컨설테이션’이었다. 시민단체와의 협의로 어떻게 인권조약기구시스템을 강화할 것인지를 논의하자는 것인데, 회의를 한달도 안 남겨두고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고 한다. 그동안의 국제회의 논의 결과에 대한 자료도 없다.
1948년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지만, 선언이 각국에 강제력이 없는 한계가 있었기에 어떻게 각국에 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 및 관행을 만들 것이냐는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게 국제인권규약이다. 규약은 국제법적인 효력이 있어서, 규약 가입국은 해당 국가에서 규약 관련 인권 현황이 어떠하고 인권 증진을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보고하고 심사를 받는다. 대표적인 규약이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관한 규약’(자유권 규약)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사회권 규약)이다. 한국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인권규약 심의를 받을 때, 한국 인권 상황을 유엔의 해당 위원회에 보고서로 보내고 사실과 다른 정부 보고서를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모든 규약에서 정부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시민단체와의 컨설테이션(협의)을 강조한다. 이는 정부 속성상 개선된 인권 상황은 부풀리고 싶고, 후퇴한 분야는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의제를 다루는 국제회의를 한국 인권위에서 주최한다고 하니 인권활동가로서 반가워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인권위는 시민사회와 협력하고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정부와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결정을 해서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전국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인권위는 묵묵부답이었고 단지 오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도 아는 상황이다. 현 위원장 체제를 비판한다고 인권위 성차별 조사관을 해고하고, 이에 대해 여성단체가 면담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한 것도 현 위원장이다. 그런데도 이런 행사를 여는 것은 이제 사태가 잘 정리되었고 시민사회와 협의가 잘 되고 있다고 호도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시민단체와의 협의가 의제라면 준비 시기부터 함께 했어야 한다. 하지만 단 한 곳의 인권·시민단체도 함께 준비한 곳이 없다. 의제는 시민단체 컨설테이션인데, 시민단체는 그저 회의에 와서 한마디만 하라는 행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인권단체를 꼭두각시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예산도 적은 인권위가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굳이 국제행사를 열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 국가인권기구는 시민사회와의 협력이 다른 어떤 기구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이를 무시한 회의에서 제대로 된 내용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초청을 받은 5개 단체를 포함해 전국 56개 단체가 이 국제회의에 불참하겠다고 인권위에 의견서를 보냈다. 지금 인권위에 필요한 것은 국제회의가 아니다. ‘알리바이’용이 아니라면 이런 행사를 열 게 아니라 인권위가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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