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07 19:48
수정 : 2011.10.0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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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이화여대 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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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영장실질심사 최후진술에서 “만약 이번 사건에서 사회적 비용을 능가하는 사회적 가치와 교훈이 도출되지 않는다면 저는 사회적 죄인에 다름 아닙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진보 지식인들이 지성 리더십의 위기에 빠져 있음은 깨달았지만 제대로 된 교훈은 아직 도출되지 않은 것 같다.
경쟁자였던 동료에게 2억원을 선의로 제공하는 게 국민 상식에 맞지 않으니 사퇴하라는 사람은 국민 상식을 독점이라도 했단 말인가. 상식이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지난 3일 서울시장 야권 통합후보 국민참여 경선장에서 곽 교육감 석방을 위한 서명을 받아보니 어르신들은 외면하고 젊은이들은 앞다퉈 서명하는 세대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많은 행동도 기존 정치인의 상식에는 맞지 않았다.
도덕이 실체적 진실과 관련된다면, 법은 실정법적 증거를 다투는 일이다. 실체적 진실은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한 양심적 인사가 선의로 주었다는 고백이며, 법적 다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다 한들 나는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겠다. 박명기 교수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싶어했을 그의 배려심, 금품 모금이 엄격하게 제한된 우리의 제도를 고려하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공직자로서 동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한 온정주의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냉혈한이 아니어서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냉대함으로써 박 교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그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민주정치는 여론정치다. 여론은 정책의 방향과 우선순위는 물론 상식과 도덕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언론과 논평가는 정치인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누리기 때문에 더 책임 있게 말하고 자신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정치인은 일을 하다 실수할 수도 있지만, 논평가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검찰이 하나가 되어 벌이는 치졸한 정치게임으로부터 일부 진보논객들은 아직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에게 가해진 검찰의 편파수사, 기획수사, 그리고 우리가 치른 희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검찰이 먹잇감만 던져주면 그것이 어떤 정치적 의도로 기획되었든 앞뒤 따지기도 전에 돌팔매부터 하는 행태가 변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마에 ‘진보’ 딱지 붙인 수많은 교수와 논객들이 곽 교육감을 옹호한답시고 저마다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문제는 졸지에 진보진영 전체의 도덕적 스캔들로 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곽 교육감 사퇴 여론은 그들 덕분에 역전되었다.
정책과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이 우리 편이니 우리 편을 감싸자는 말이 아니다. 지식인이라면 원칙에 충실하고 공정하라는 말이다.
“과거 보수의 도덕적 스캔들 앞에서도 진보는 무죄추정하고 법원의 판결만 기다렸던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에게 가해진 사퇴 주장은 1심 후에, 본격적인 압박은 고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후에야 나왔다. 보수는 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하고, 진보는 법적 다툼도 전에 사퇴를 해야 한다면 그게 진보가 말하는 정의인지 묻고 싶다.
선거를 연구해본 적도 없는 변호사가 선거를 위해 곽 교육감과의 절연을 주장하고, 법과 거리가 먼 전공자가 유죄를 추정하는 논평이 바로 진보가 지성 리더십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증거이다.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전공에 충실하거나, 적어도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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