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20 19:22
수정 : 2012.05.20 19:22
|
김현진 에세이스트
|
늘 ‘돈 안 쓰고 노는 게 이기는 거다’라고 주장하면서도, 내가 가는 곳이라고는 고작해야 도서관 정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살고 있는 상암동에는 갈 만한 도서관이 가깝지 않다. 백수가 가진 유일한 자원인 시간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근방의 도서관이 다 지하철로 대여섯 정거장 거리라 돈 안 쓰고 놀기가 녹록잖다. 그러다 상암동의 새로운 랜드마크 박정희기념관이 생겼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당장 개관식에 계란이라도 던지고 싶었으나 박정희 기념관 겸 ‘도서관’이라는 소식에 비겁하게 계란 투척 계획을 슬그머니 포기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책은 없고 하반기에나 슬슬 들여놓겠다고 한다. 이래저래 돈 안 쓰고 논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프루걸리스타(frugalista)라는 생소한 단어가 표제에 쓰인 책을 발견했다. 검소함을 뜻하는 프루걸(frugal)과 유행을 선도하는 패셔니스타(fashionista)가 합성된 신조어로, 2009년에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었고 <뉴욕 타임스> 선정 올해의 단어로 뽑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루걸리스타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100달러짜리 옷을 사던 것을 16달러짜리 셔츠로 만족하고, 주차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파티를 골라 가라는 둥 영 와닿지 않았다. 그 책을 읽으며 그날 찾아간 곳은 화가 지용현의 두 번째 개인전 오프닝이었는데, 부끄럽지만 갤러리라는 곳에 그림을 보러 가본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마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더라면 가보지 않았을 곳이었는데, 앞으로도 평생을 걸쳐 해야 할 과업인 ‘돈 안 쓰고 잘 놀기’ 프로젝트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경험이었다.
정작 나도 “돈 안 쓰고 잘 노는 게 진짜다”라고 늘 말은 하지만 고작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 빌려서 본다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돗자리를 깔고 논다거나 하는 게 전부였다. 돈 안 쓰고 노는 것의 핵심은 ‘품’이다. 품 들이는 것이 돈 안 쓰고 노는 것의 묘미다. 바지런하게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보는 데 품을 들여야 하고 뭐가 재미있을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아야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품을 들여야 하는데, 다들 돈 쓰고 노는 거 좋아하는 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품 안 들일 수 있는 게 좋기 때문이다. 이날 본 그림은 모두 웬만한 책장만큼 커다랬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림의 디테일들이 거의 여자들의 네일아트에 필적할 만큼 공을 들인 것들이라 그 들인 ‘품’에 일단 압도되었다.
전시를 주관하는 유엔시(unc)갤러리의 큐레이터 홍혜경씨가 문외한을 위해 기꺼이 충고해 주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을 다들 어렵게 생각하시는데 그냥 보고 느끼시면 돼요. 작가의 의도가 뭘까 이런 고민도 지나치게 하실 필요가 없고, 그런 것을 알아야 된다는 강박보다 무엇이 느껴지는가, 내 느낌을 그대로 즐기시면 그게 훌륭한 미술 감상입니다.”
그림이 쏟는 에너지에 한동안 멍해 있다가, <서울 아트 가이드> 한 권을 집어 왔다. 또 품을 들여 돈 안 드는 즐거움을 누릴 셈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이 담긴 그림을 보면서, 정말이지 뭐가 됐든 품을 들이는 것들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공짜로 이런 것을 구경할 수 있다는 걸 여태 몰랐다니 부끄럽지만, 이렇게 또 하나 품의 매력을 알게 됐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