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기고] 건강보험은 로또복권이 아니다 |
이진석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질병은 가계 파탄의 주범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료비는 실직, 수입 감소와 더불어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떨어뜨리는 3대 원인이다. 통계청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노인이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건강 문제(40.3%)가 경제적 어려움(41.4%)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질병 중에서 가계 파탄을 야기하는 질병은 도대체 어떤 것들일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암, 심장병, 중풍, 희귀 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으로 일컬어지는 질병들이다. 새누리당이 지난 총선에서 ‘4대 중증질환 진료비를 국가가 100% 책임진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박근혜 후보가 며칠 전 당내 정책토크쇼에서 이 주장을 반복한 것도 바로 이런 인식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잊었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내건 공약 가운데에도 ‘중증질환자에 대한 완전의료비보장제도’가 있었다. 지금의 새누리당 공약, 박근혜 후보의 주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 임기 동안 중증질환에 대한 완전보장은 고사하고, 건강보험 보장률은 더욱 악화되었다. 한마디로 부도난 공약인 셈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고액환자 분석통계를 보면, 서민 가계를 위협하는 질병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4대 중증질환자는 전체 고액의료비 환자의 30%인 60만명이다. 나머지 70%를 차지하고 있는 130만명은 패혈증, 간경화 등 비교적 익숙한 질병에서부터 의사인 나조차도 이름이 생경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진료비가 수백만원이 채 안 되는 갑상샘암은 4대 중증질환이라서 국가가 진료비를 100% 책임지고, 진료비가 수천만원~수억원이 넘는 무수히 많은 질병들은 4대 중증질환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은 형평에도 어긋나고, 고액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탄을 막는 해법도 아니다.
4대 중증질환 중심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식의 한계는 이미 경험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4대 중증질환의 본인부담률을 인하하고, 건강보험 적용 항목을 늘렸다. 그 덕분에 이들 질환자의 진료비 부담은 제법 줄어들었지만 고액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탄은 여전했다. 혜택을 받는 환자보다 혜택에서 제외된 고액의료비 환자가 훨씬 많았던 탓이다. “중병에 걸리려면, 이왕이면 4대 중증질환에 걸리라”는 말이 나왔던 때도 이즈음이었다.
건강보험이 로또복권도 아닌데 어떤 병에 걸리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계를 위협할 정도의 고액의료비라면 질병에 상관없이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이렇게 해야 일상화된 국민의 의료 불안을 덜어줄 수 있다.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어떤 질병에 걸리든 환자의 연간 본인부담금 합계가 20만~50만원을 넘으면, 그 초과분을 전액 건강보험이 지급하는 본인부담 상한제를 두고 있다. 독일의 연간 본인부담 상한은 총소득의 2%, 장기 만성질환자는 총소득의 1%이다.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본인부담 상한제를 2004년에 도입했지만, 고액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탄을 막는 애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건강보험 영역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상한제 적용에서 제외되는 비보험 진료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비보험 진료를 대거 건강보험 적용 영역으로 포함하고, 유럽 국가들보다 10배나 높은 현행의 연간 본인부담 상한을 더욱 낮추는 것이 고액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5년 전에 이미 부도난 공약을 재탕하는 것은 성의 없는 면피용 공약이라는 질타를 받기에 충분하다. 60만명은 구하고 130만명은 버리겠다는 30%짜리 건강보험 정책이 아니라, 이들 모두를 구하는 건강보험 정책이 필요하다. 오늘도 대다수 국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의료비 시한폭탄’을 떠안은 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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