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기고]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과 그 의미 / 이도흠 |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최강서, 이운남, 최경남, 이호열, 이기연 노동자가 자살하거나 그 장례를 치르다가 죽었다. 대선 패배가 누구에게는 환희이고 누구에게는 좌절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이었다. 연이은 노동자의 죽음을 접하면서 좌절도 사치임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웠다.
무엇이 그들을 죽였는가. 한마디로 ‘아득한 절망’이다.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투쟁하던 활동가였다. 생계나 대선 패배만이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치, 내일이 보이지 않는 노동운동에 대한 절망감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지독한 절망 속에 있음을 죽음을 통해 절규하고 있다. 자살이라는 최후수단으로 노동자 바깥의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조직차장의 입장에 서보자. 한진중공업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아니라 ‘극단의 이익’을 위하여 3000여명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통해 거리로 내쫓았다. 10년간 이 회사의 흑자액은 4277억원이며, 2008년에 조남호 회장이 가져간 주식배당금은 120억원에 달한다. 이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르고 시민들이 희망버스로 연대하고 야당과 국민은 물론 여당마저 조남호 회장을 질타하자 사회적 합의에 의하여 노동자들을 복직시켰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일감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이 복직한 지 3일 만에 최강서 차장을 비롯한 노동자들을 다시 공장에서 내쫓았다. 그러고는 파업과 무관한 도장작업 지연, 납기 지연 등을 끌어다 붙이고 액수를 부풀려 158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공장에서 내쫓겨 월급도 받지 못하는 자가 어찌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물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총체적인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동지들인데, 동료들 상당수가 어용노조로 들어가서 딴소리를 한다. 민주노조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파로 갈라져 있다. 온도 차이만 있을 뿐, 이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 이 땅의 노동자들은 죽는 것보다 힘든 하루하루를 간신히 견뎌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15년 동안 자본과 국가, 언론, 사법부, 정치인, 지식인, 시민 등 모두가 나서서 노동을 배제하고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김대중 정권은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법을 통과시키고, 이명박 정권은 철저히 자본의 편에 서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남발하고, 이에 저항하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사법부는 자본의 편에 서서 심판하고, 보수언론은 과격분자나 경제혼란범으로 매도하여 재취업조차 어렵게 하는데, 여당은 압박하고 야당과 시민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며, 국가와 자본, 사법부, 언론,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또한 공범이다.
어떻게 죽음을 막을 것인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철폐는 좌파적 구호가 아니다. 30대 대기업의 경우 당기순이익의 1.5%만 투자하면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경기가 불황이고 일감이 줄더라도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어 외려 생산성을 더 올릴 수 있다. 노조 파괴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의 기본권을 해치는 위헌 행위이므로 당장 중단하고 관련자는 구속해야 한다. 물론 노동조합도 정파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단결하여 올바른 투쟁을 해야 한다. 자본, 국가, 노동 모두 근본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인간답게 함께 잘사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 또한 내일이 없다.
음악과 연기는 부차적 이유이고,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만이 대안일 정도로 불평등한 사회, 혁명 이후의 반동과 휴머니즘에 공감하여 거의 500만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이제 공감으로 그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지극히 불행한 사람들’과 연대하자. 눈물을 흘린 관객 가운데 10%만 연대한다면, 설사 악마가 집권한다 하더라도 그를 물리칠 수 있다. 19일 오후 5시에 서울광장에서 비상시국대회가 열린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민교협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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