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3 19:18
수정 : 2013.01.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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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농부철학자·전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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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당신을 찍지 않았습니다.
실은 아무도 찍지 못했습니다. 일이 있어 서울에 붙들려 있었는데, ‘주소지’는 외딴섬이어서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투표권’을 ‘행사’했다면 야당 후보를 찍었을 겁니다. 어쩌다 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면 그 먼 길 가지 않았음을 땅을 치며 뉘우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대통령 당선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첫 선거권이 주어졌을 때, 나는 당신의 아버지 박정희를 찍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루아침에 당신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나는 ‘빨갱이 사냥’에 형 여섯을 잃은 사람입니다. 가장 나이 어린 형은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일입니다.
내 형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이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까막눈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런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던 사람은 만 명에 하나, 아니 십만 명에 하나도 안 되었을 겁니다. 해방이 힘센 나라들의 힘으로 거저 이루어진 판에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려고 38선이 그어졌는데, 통일된 나라로 천년 넘게 살아왔으므로 일본군이 물러나면 당연히 38선은 없어지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만에 9990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가 부정부패와 극심한 빈부격차로 무너졌으므로,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0.1%만 잘살고 99.9%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고, 모두가 고루 잘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이 100에 99명은 되었을 겁니다. 제 짐작으로는 그 시절에 열다섯 살이 넘으면 모두 철든 어른 대접을 받았으므로 죽은 형들도 통일과 사람들이 고루 잘사는 세상 편이었으리라고 뒤늦게나마 미루어 짐작합니다.
그런데 내 형 여섯을 앗아간 전쟁이 벌어졌고, 그 뒤로 남과 북은 서로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로 갈라섰습니다. 이것은 우리 뜻이 아니고, 힘센 나라들이 부추겨서 그리된 것임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압니다. 나는 당신의 아버지도 이념의 희생자였다고 봅니다.
다행히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당신 아버지는 7·4 공동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었던 김일성과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온 세계에 널리 알렸습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그 뒤로 역대 대통령이 그 뜻을 옳다고 여겼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평화의 가교를 놓는 데에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신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겠다는 뜻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으리라고 봅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는 온갖 경험담과 논리로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명박 정권이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다행히 중국에 사절을 보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중국은 미국 못지않게 우리에게 큰 힘을 행사하는 나라여서 그동안 꼬였던 가닥을 잘 풀어내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쪽이 북녘을 따돌리고 중국과 직거래를 하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저쪽이 남녘을 따돌리고 미국과 직거래하기가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 평화 교류와 긴장 해소가 커지면 그에 비례하여 복지에 쓸 수 있는 재원도 쉽게 마련될 것입니다. 복지비용을 마련할 다른 길은 잘 안 보입니다.
잘 판단하셔서 빈부격차 해소와 남과 북의 평화에 디딤돌을 놓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윤구병 농부철학자·전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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