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26 18:59
수정 : 2013.04.2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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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 전문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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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선비가 쓰는 갓이 맞는지 봐주세요.” 케빈 오록 교수는 책과 자료 더미들을 옆으로 밀치며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영국에서 출간을 앞둔 책의 표지 디자인이었다. <나의 한국 - 갓 없이 40년>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시대 갓이 보였다. 그는 한국에 산 지 겨우(!) 50년밖에 안 되는 외국인이다. 갓 테두리 모양새가 좁은 것으로 보아 양반이나 선비들이 쓰던 게 아니라 중인들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쩌면 그게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웃더니 편집자와 다시 의논해 봐야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갓 없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책은 그간 한국에서의 개인적·학문적 삶의 기록이다. 아일랜드에서 선교사로 1960년 초 한국에 부임해 온 그는 올해로 사제수품 50주년을 맞는다. 처음 몇 년은 춘천에서 본당을 돌보았지만 그 후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또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 바로 한국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일, 한국 문화의 정신을 세계인에게 읽히는 일에 매진해온 것이다.
그의 가장 최근작은 <김삿갓 시선>(2012)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까마득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김삿갓의 시를 그는 아름다운 영시로 변모시켜 놓았다. 이 일의 시작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인훈의 <광장>, 서정주의 시선, 이규보의 한시들, 그리고 신라 향가와 고려 시조들이 그의 손을 거쳐 하버드, 아이오와 등 세계 여러 대학 출판사에서 나왔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작품들을 번역해 내놓은 게 모두 20권이 넘는다.
그런데 ‘갓 없이’라는 표현에는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다. 한국인들이 그에게 결코 갓을 씌워주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린다. 평생에 걸친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 ‘한국 문학’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외국인 국문학 박사 1호라는 칭호는 인정해 주지만 결코 국문학자로는 대접하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를 그는 진작부터 느껴왔다는 뜻이다. 만약 한국인이 저 많은 분량의 한시선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해설을 붙여 세계 문단에 내놓았다면 그 성취를 얼마나 크게 쳐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두어 해 전 아일랜드 정부는 한국과 아일랜드 간의 문화적 가교 구실을 한 그를 기념하는 상징적 조처를 취했다. 주한 아일랜드 대사관 내에 ‘오록 라이브러리’를 헌정했고, 한국 정부도 그의 문화적 공헌을 기려 훈장을 내렸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영광은 학계의 냉랭한 반응만큼이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저 문학에 눈 있는 이들이 작품집을 살펴보시라고 당부할 뿐이다. 하지만 더는 아름다운 ‘우리’ 옛 시를 읽으려 하지 않는 세태에 대해선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베어울프에서 시작된 영시의 전통이 당송시대, 그리고 우리 고전 한시의 전통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영시가 훌륭하긴 하지만 한시에서 배어나오는 명징하고 찰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엔 한수 아래라는 거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 그는 지금도 아일랜드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조선시대 소설을 번역하는 데 보내고 있다.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말하는 그는 한국이 케이팝이나 스마트폰 기술만 훌륭한 나라로 알려지는 것을 당치 않은 일이라 여긴다. ‘외국인’인 그는 우리 정신의 아랫목에 좌정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사람’은 방 문고리를 잡고 어정쩡하게 제자리를 못 잡고 있는 듯하다. 글로벌 다문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케케묵은 전통 타령일까?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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