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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28 18:46 수정 : 2015.10.28 18:46

올여름까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베를린 시내 곳곳을 다녀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베를린이 런던과 파리, 뉴욕과는 좀 다른 기억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를린은 나치시대의 독재와 종전 이후의 민주화, 그리고 냉전체제하의 분단과 1990년의 동·서독 통일 과정을 다양한 기억의 공간에 담아두고 있다. 도시는 독재와 분단을 기억하고, 시민들은 이 기억 속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다른 세계의 대도시가 랜드마크를 만들고 그에 따른 ‘건물의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면, 베를린은 역사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기억의 풍경’을 만들어 각성된 시민들을 키우고 있다.

베를린에는 홀로코스트 기념관, 테러의 지형학 기념관 등 유태인 학살과 나치의 국가테러와 관련된 유명한 곳이 많다. 그런데도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훔볼트대학 주변의 두 곳이다. 하나는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상이 있는 노이에 바헤 박물관이다. 콜비츠의 피에타상은 전쟁에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절실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압권은 피에타상 하나만을 위해 건물 전체를 비워놓고, 천장을 뚫어 눈비가 들이치도록 한 박물관의 공간적 설계였다. 지난해 겨울 어느 날 나는 이미 어두워진 그 공간에서 몇십분간 머물며 전쟁의 참혹함과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나는 그 맞은편 베벨 광장에 있는 ‘비워진 도서관’, 즉 분서 기념관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곳은 1933년 5월10일 나치가 비독일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며 수만권의 책을 불태운 이른바 ‘나치판 분서 사건’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에밀 졸라, 카를 마르크스 등의 저술들이 불타버렸다. 이 기념관은 광장 바닥에 놓인 조그만 유리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빈 서가가 전부다. 이곳은 나치시대에 자행된 비문명적 행위를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성찰하도록 기획되어 있다. 노이에 바헤 박물관이 피에타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웅변의 공간이라면, 분서 기념관은 비워진 서가의 도서관을 통해 사라진 책들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은유적 침묵의 공간이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책을 태우면 사람도 불태운다”는 말로 나치시대의 분서 사건을 질타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 독일인은 이곳에서 분서의 역사를 성찰하며, 민주주의에서 철학과 사상의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배우고 있다.

나치는 책을 불사르면서까지 독일의 사상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나치의 제3제국은 불과 13년 만에 붕괴됐다. 진시황제 역시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진나라 이전의 책을 불살랐고 생각이 다른 유생들을 생매장했지만, 진나라는 25년 만에 몰락했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1970년대 국정 교과서는 당시 새마을운동과 10월 유신을 미화하려고 했지만 그 정권은 18년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런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때에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바꾸겠다고 하니 시대착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5년 단임의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면서 역사학자들의 자유로운 교과서 집필권을 박탈하고 국가가 독점하겠다고 하니 학자들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걱정이 많다. 이러다가 정권 교체 때마다 역사 교과서가 개편되는 것이 아닌가 두렵기도 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나치의 분서행위도 불과 몇십년을 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나는 훔볼트대학 맞은편 분서 기념관에서 나치시대의 사상 통제 위험성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 기념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을 뉴스로 봐야 하는 암울한 현실 속에 있다. 국정 교과서는 박물관에 유물로 전시되어 있어야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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