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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2 18:49 수정 : 2015.11.02 18:49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정부의 역사 인식과 행보가 우려스럽다. 지난 9월 공개된 ‘대통령 지시사항 실적 제출’ 제목의 교육부 공문에 따르면 지난해 2월13일 이미 역사교과서 제도 개선이 지시되었다. 당시는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가 전국의 고등학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시기로, 이때부터 교학사류의 교과서를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국정화라는 판단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2008년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좌편향’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은 바 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청소년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극찬했다. 이 대안교과서는 식민지 근대화론, 1948년 건국절, 그리고 개발만능주의 및 권력자 중심의 역사관을 나타내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는 이를 상당 부분 수용한 첫 번째 교과서였다.

사실 이 모든 주장의 뿌리에는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사에서 친일은 한 차례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해방 직후 맥아더의 포고령은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일제시대 경찰, 공무원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았다. 마지막 기회였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력으로 짓밟혔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력과 부를 누리는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이름 짓는 것은 최종적으로 이를 정당화하게 된다. 친일로 권력과 부를 누리던 자들이 순식간에 개국공신으로 둔갑하는 마법의 지팡이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에서도 그랬듯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날을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로 정의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하다.” 1919년 4월11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이 결의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이다. 당시까지 우리는 모든 인민이 평등한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왕이나 황제를 모시면서 수천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나라가 망한 지 9년 만에 대한‘민국’을 선언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은 왕이 통치하는 세상을 종식하고 인민이 지배하는 나라를 선언했으니 이는 무혈혁명에 의한 건국이다.

1948년 7월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하고…”로 적시했고, 그해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제1호는 발행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1일’로 표기했다. 태극기는 1942년 임시정부에 의해 법령으로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안익태의 애국가도 1940년 임시정부에서 승인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자신도 1948년 5월31일 제1차 국회 개회사에서 “오늘의 국회는 기미년에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라고 했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96주년이다.

교육부가 제작해 배포한 ‘올바른 역사교과서-유관순 열사편’은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사라졌다는 선동으로 국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치졸하지만 한 가지만 이르자면 유신시대인 박정희 정권 때의 국정교과서에는 유관순 열사가 없었다. 선동의 이면에 있는 진실, 2014년까지 8종의 교과서 가운데 6종에 유관순이 기술되어 있다.

곽태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방광이 터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숨졌다.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일제가 군용기지로 쓰면서 주검도 사라졌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가 열사에게 부끄러운데, 하물며 열사를 핑계로 국정교과서로 회귀하려는 선동을 보고 열사가 느낄 고통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곽태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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