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04 19:32
수정 : 2016.04.04 21:32
사업을 접어두고 여행이나 하면서 소일하던 친구가 ‘소녀상’을 보러 가자고 한다. 그에게서 새삼스러움을 느끼면서 좇아갔다.
소녀상은 탐라도서관(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바로 곁에 있는 소공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녀상을 제주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금을 모아 소녀상을 조성한 학생 및 시민단체에 깊은 감사를 보내고 싶다.
소녀는 주먹을 꼭 쥐고 입은 굳게 다물어 울음을 참으면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것으로 보아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다. 전생에 무슨 팔자를 타고났길래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끌려간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8만명에서 최대 20만을 헤아린다. 이 중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38명에 불과한데, 이들만 생사가 분명하고, 다른 이들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자기의 과거를 밝혀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실을 밝히는 용기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비로소 가능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 죽은 듯 살아야 하는 처지에서, 자기를 드러내야 하다니, 완전히 산송장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자기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죽음을 담보로 하여 밝히는 증언에 대하여 한사코 그 강제성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철면피를 증오한다.
강일출 할머니는 15살 때 중국 무단장 위안소에서 2년을 보내던 중에 장티푸스에 걸렸다. 일본군은 이 병에 걸린 위안부들을 산속으로 끌고 갔다. 구덩이에 밀어 넣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제일 나중에 던져진 할머니는 독립군의 도움으로 기적과 같이 탈출하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14살부터 5년간 위안부가 되어 광둥·홍콩,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로 끌려다녔다. 해방 뒤에 만난 남편도 죽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 혼자 가게를 꾸렸다. 후유증으로 자식도 없었다. 정신대 피해자임을 신고하지 말라는 언니의 권고를 뿌리치고 결국 신고를 했더니, 언니도 조카들도 발길을 끊었다. 신고의 대가는 한없는 외로움이었다.
할머니들은 집으로 돌아온 귀향(歸鄕)이 아니라, 심신이 갈기갈기 찢겨 귀신이 되어 돌아온 귀향(鬼鄕)이 되었다. 그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숨죽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야 했다.
순진무구한 십대 소녀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난 죄밖에 없었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그들을 지키지 못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땅의 위정자들은 수백년 동안 여자들의 순결은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위선자들이었던 것이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으로 외친다. 앞으로는 한사코 외침을 막아내라고. 소녀들의 지옥 같았던 삶을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소녀들의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돌이킬 수 없이, 불가역적으로 만들어놓고, ‘불가역’하라니 무슨 개뿔 같은 소리냐고 아베와 그 일당들에게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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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림 제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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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소녀상 곁에서 그녀들을 기억하며 ‘불가역’을 지우고 되새김할 것이다. 그것은 정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은 평화의 상징이다. 소녀상을 지키는 것은 평화 수호의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일제는 우리를 식민통치한 데 이어 동족상잔의 참극에도 깊이 간여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평화가 얼마나 지고한 가치인지를 안다. 이것이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소녀상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서경림 제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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