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01 22:59
수정 : 2016.06.01 22:59
지난달 작가 한강이 소설 <채식주의자>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는 낭보를 전했다. 영국의 부커사가 제정한 이 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어 이번 수상은 그 의미가 커 보인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국내 일부 언론 보도는 그리 새삼스럽진 않지만, 그녀의 수상을 국가주의와 공모한 경제적 관점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데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가령 문학한류의 길을 열었다든지, 한국 문학의 매력에 빠져드는 해외 출판시장 등의 경제적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창조적으로 전환하기보다 이를 일시적 해프닝으로 그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우려는 문화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미망이 향후 관련 정책에 유사하게 투영될 여지가 높다는 차원에서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 수상은 작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이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지만 번역이 그 장벽을 넘게 해주고, 이를 또 다른 창작의 경지로 끌어올린 번역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는 동시에 향후 정부의 문화정책을 포함해 창조경제의 비전과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숙제를 던져준다.
최근 정부의 창조경제 관련 정책은 그 안에 과연 창조성에 대한 진중한 고민과 비전이 있는지, 문화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에 기반해 여기에 담긴 다양한 가치를 읽고 반영하려 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문화가 미래성장 동력의 핵심이고 이를 산업화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은 이미 20년도 넘은 대한민국 문화정책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진부하다. 문제는 자명한 선언적 담론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 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이것이 창조경제와 어떻게 연결될지, 이를 위해 구현할 콘텐츠는 무엇이고, 이 과정에서 추구해야 할 정책의 방향성과 구체적 실천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논의의 장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창조’와 ‘클러스터’, ‘글로벌’과 ‘한류’, ‘컬처’와 ‘페스티벌’ 등을 뒤죽박죽 섞어 지역의 특색과 장소성이 소거된 이런 월드나 저런 밸리는 세계 도처에 유사한 규모와 시설의 인프라가 많아 차별화하기 어렵다. 또 <태양의 후예> 같은 드라마 콘텐츠를 ‘사후적으로’ 활용해 관광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또 그것을 문화산업의 전부라 인식하는 단견으로 창조경제는 구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드라마와 영화, 케이팝 등으로 촉발된 한류문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수출 등의 경제적 언어를 넘어 한국의 언어와 전통, 생활양식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실천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정주민의 삶과 일상, 예술과 놀이를 기반으로 다채롭고 풍성한 작은 문화들을 만들어가는 데 사회적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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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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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해외 사례뿐 아니라 국내 지자체, 가령 서울시의 공방이나 예술가 지원 사업, 성수동 구두거리 등 작지만 흥미롭고 창의적인 문화예술 지원정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나아가 문화를 통해 돈을 벌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일뿐 아니라, 문화의 자율성, 창의성, 사회윤리적 고려, 인문전통의 강화, 삶과 놀이로서의 참된 문화 역량을 키워가는 데 힘써야 한다. 작고 소박하지만 다채롭고 창의적인 문화예술정책은 이번 수상을 가능하게 한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한국 문화를 자발적으로 배우고 향유하는 수용자의 확산에, 그리고 국가 간 소통과 연대에 기여할 것이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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