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둘러싼 한-일 양국 간 갈등은 2015년 합의 이후 우리 내부 문제로 바뀐 듯하다. 당사자가 배제된 가운데 체결된 정부 간 합의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합의문을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도 한사코 공개를 거부하는 외교부의 태도는 소녀상 철거에 관한 이면합의가 존재할 것이란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양국의 12·28 합의 이행을 강조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3·1절 기념사는 이런 의구심을 확신으로 만들고 있다. 고개 숙여야 할 일본 정부는 오히려 합의를 이행하라며 당당하고 피해 당사자들은 우리 정부까지 상대하여 싸워야 하니, 세월이 지날수록 할머니들의 세상 등지는 소식에 가슴이 졸여온다. 그런데 잘못된 협상으로 난마처럼 얽힌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뜻밖에도 작가들과 저작권에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 조각가는 작년에 <빈 의자에 새긴 약속>이란 책을 내놓았다. 이들은 20년 넘게 수요집회를 해온 할머니들을 보면서 마음의 빚을 갚고자 1000번째 집회가 열리던 2011년 12월에 소녀상을 설치했다고 한다. 단발머리, 살짝 든 뒤꿈치, 그림자, 나비, 어깨 위의 새 등은 제각기 의미를 지닌 것이다. 작가들은 소녀 옆에 빈 의자를 배치해 거리의 관객들이 나머지를 채우게 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빈자리에 앉아보기도 하고 추울 땐 소녀상에 털모자를 씌우거나 목도리를 해주며 무릎에 담요를 덮기도 한다. 관객들이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되살리는 소녀상은 단순한 위령비가 아니다. 작품에 심겨 있는 암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건너편 일본대사관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이 아닐까 한다. 하얀 도화지에 옅은 색으로 밑그림을 그려갈 꽃다운 나이에 먹칠을 당하여 평생 회한 속에 살아온 여성이 ‘자발적 성매매를 했다’며 강제성을 부정해 온 일본을 향해 부릅뜬 그 두 눈 말이다. 오죽하면 일본은 자국 대사를 초치하면서까지 소녀상을 불편해하겠는가. 시선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소녀상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가치는 일본대사관 건너편인 바로 그 장소에 있는 셈이다. 장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을 장소특정적 예술(site specific art)이라 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작품이 어느 장소에 있든 예술적 가치가 손상되거나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다. 소녀상은 다르다. 일본대사관 앞을 떠나 미술관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된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이를 저작인격권, 좁혀서 동일성유지권이라 한다. 작품은 작가 인격의 일부라는 것이다. 작품의 소유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도 저작인격권은 작가에게 남는다. 따라서 소녀상 이전은 작가들의 저작인격권 침해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소유권자인 정대협이 양해해도 이전을 강행할 수 없다. 최근 종로구가 소녀상을 함부로 철거할 수 없도록 공공조형물로 지정하는 조례 개정안을 만들었다. 그 뜻은 훌륭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소특정적 예술의 경우 작가의 동의도 필요한데 이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강남의 고가 아파트 서너 채 값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날려버린 정부. 과연 정부가 구체적 위임 없이 민간인의 의사에 반하는 처분행위를 민간인을 대리해 정부 간 합의로 끝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이 합의로도 ‘평화의 소녀상’ 작가들의 저작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소녀상 이전을 원치 않는 할머니들뿐 아니라, 혹시 잘못된 합의였음을 인식하고 이행을 거절하고 싶어도 합의 번복이란 비난을 받을까 주저하는 정부에도 작가의 저작권은 뜻밖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칼럼 |
[기고] 소녀상 합의의 출구, 저작권 / 남형두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둘러싼 한-일 양국 간 갈등은 2015년 합의 이후 우리 내부 문제로 바뀐 듯하다. 당사자가 배제된 가운데 체결된 정부 간 합의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합의문을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도 한사코 공개를 거부하는 외교부의 태도는 소녀상 철거에 관한 이면합의가 존재할 것이란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양국의 12·28 합의 이행을 강조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3·1절 기념사는 이런 의구심을 확신으로 만들고 있다. 고개 숙여야 할 일본 정부는 오히려 합의를 이행하라며 당당하고 피해 당사자들은 우리 정부까지 상대하여 싸워야 하니, 세월이 지날수록 할머니들의 세상 등지는 소식에 가슴이 졸여온다. 그런데 잘못된 협상으로 난마처럼 얽힌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뜻밖에도 작가들과 저작권에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 조각가는 작년에 <빈 의자에 새긴 약속>이란 책을 내놓았다. 이들은 20년 넘게 수요집회를 해온 할머니들을 보면서 마음의 빚을 갚고자 1000번째 집회가 열리던 2011년 12월에 소녀상을 설치했다고 한다. 단발머리, 살짝 든 뒤꿈치, 그림자, 나비, 어깨 위의 새 등은 제각기 의미를 지닌 것이다. 작가들은 소녀 옆에 빈 의자를 배치해 거리의 관객들이 나머지를 채우게 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빈자리에 앉아보기도 하고 추울 땐 소녀상에 털모자를 씌우거나 목도리를 해주며 무릎에 담요를 덮기도 한다. 관객들이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되살리는 소녀상은 단순한 위령비가 아니다. 작품에 심겨 있는 암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건너편 일본대사관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이 아닐까 한다. 하얀 도화지에 옅은 색으로 밑그림을 그려갈 꽃다운 나이에 먹칠을 당하여 평생 회한 속에 살아온 여성이 ‘자발적 성매매를 했다’며 강제성을 부정해 온 일본을 향해 부릅뜬 그 두 눈 말이다. 오죽하면 일본은 자국 대사를 초치하면서까지 소녀상을 불편해하겠는가. 시선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소녀상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가치는 일본대사관 건너편인 바로 그 장소에 있는 셈이다. 장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을 장소특정적 예술(site specific art)이라 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작품이 어느 장소에 있든 예술적 가치가 손상되거나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다. 소녀상은 다르다. 일본대사관 앞을 떠나 미술관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된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이를 저작인격권, 좁혀서 동일성유지권이라 한다. 작품은 작가 인격의 일부라는 것이다. 작품의 소유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도 저작인격권은 작가에게 남는다. 따라서 소녀상 이전은 작가들의 저작인격권 침해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소유권자인 정대협이 양해해도 이전을 강행할 수 없다. 최근 종로구가 소녀상을 함부로 철거할 수 없도록 공공조형물로 지정하는 조례 개정안을 만들었다. 그 뜻은 훌륭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소특정적 예술의 경우 작가의 동의도 필요한데 이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강남의 고가 아파트 서너 채 값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날려버린 정부. 과연 정부가 구체적 위임 없이 민간인의 의사에 반하는 처분행위를 민간인을 대리해 정부 간 합의로 끝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이 합의로도 ‘평화의 소녀상’ 작가들의 저작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소녀상 이전을 원치 않는 할머니들뿐 아니라, 혹시 잘못된 합의였음을 인식하고 이행을 거절하고 싶어도 합의 번복이란 비난을 받을까 주저하는 정부에도 작가의 저작권은 뜻밖의 해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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