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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7 17:58 수정 : 2018.06.08 16:21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5월26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방명록 서명을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라고 적은 것은 뜻이 깊다. 우리는 동족상잔 이래 북한을 ‘북괴’(북한괴뢰)라고 부르다가 어느새 괴뢰는 빼고 ‘북한’으로 불러 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공식 명칭을 쓴 것을 환영한다.

독일은 1970년부터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쓰면서 동·서독이 기본조약을 체결했고, 유엔에 동시가입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서독·BRD)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DDR)이라는 국호를 서로 자연스럽게 써 왔다. 우리의 경우,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고도 공식 명칭 대신 ‘북한’, ‘남조선’을 여전히 쓰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나는 30년 전 베를린공대 연구원으로 있을 때 베를린 남쪽 미국지역 장벽 옆에 살았다. 지하철로 출퇴근했는데 불 꺼진 동베를린을 지나 서베를린의 대학에 갔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에서 동서독 승무원의 교대가 인상 깊었다.

동베를린에 갔을 때 자연사박물관의 얀 교수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오페라 표를 사주었다. 통일 후 다시 갔을 때는 브레히트의 연극 <갈릴레오의 생애>를 보았다. 통일 직전에도 포츠담에서 비자를 받아 동독 전역을 여행했다. 마르크스와 안호상이 박사학위를 받았고 해켈이 교수로 있었던 예나대학을 찾았으며, 라이프치히대학 카를 주트호프 의학사·과학사연구소에서는 초청발표도 했다.

통일과 함께 실직한 동독 과학학의 대부 크뢰버를 집으로 찾아가니 버번위스키(미국 술)를 권하며 반가워했다.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친구가 사 온 북한산 인삼술을 함께 마셨던 세 젊은 동독 과학사학자들은 살아남아 베를린의 막스 플랑크 과학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늘 동독을 ‘민주독일’이라 불렀다.

통일 전 함부르크에서는 주체사상에 물든 제자와 코른(독일 소주)을 마시며 밤늦게까지 싸웠다. 뮌헨의 독일박물관에 있을 때는 북한 서커스단이 왔다기에 가 보았다. 공연이 끝난 다음 무대로 찾아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단원들과 한잔하고 싶었지만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북한 축구선수들에게 밥을 사 주었다가 귀국할 때 김포에서 잡혀간 친구 형 생각이 나 참았다.

1991년 나는 한민족철학자대회에 북한 학자들의 초청을 부탁하러 당시 한국철학회 소광희 회장과 함께 일본 도쿄의 조선대학교를 찾아갔다. 한국 학자들의 첫 공식 방문이었다. 우리는 박용곤 부학장, 현원석 철학부장, 김철앙 교수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대회의 성공을 다짐했다. 우리의 초청장은 평양의 황장엽에게 전해졌고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명칭 문제로 결렬되었다.

나는 거의 해마다 조선대를 찾아갔고 임정혁 과학사 교수의 호의로 강의도 여러 번 했다. 임 교수는 한국의 학회에 왔고 논문을 많이 기고해 논문상도 받았다. 조선대 교수들은 북한을 ‘공화국’이라 부른다, 나도 예의를 차려 아직까지 ‘공화국’이라 부른다. 조선대 교수들도 고마워하며 ‘남조선’ 대신 ‘한국’이라 부른다. 편지봉투에는 ‘대한민국’이라 쓴다.

한국은 1990년 소련(러시아), 1992년 중국과 각각 수교했지만 조선은 아직도 미국,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교차수교가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핵 개발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한국은 ‘조미’, ‘조일’ 수교를 적극 도와야 한다. 언론부터 ‘북한’을 ‘조선’이라 불렀으면 좋겠다. 그러면 조선의 언론도 ‘남조선’을 버리고 ‘한국’을 쓰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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