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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19 17:13 수정 : 2018.06.28 11:02

한국칸트학회판 칸트 전집 논쟁 두고
국내 대표적 후설 학자 이종훈 비판글
“문제 발생 원인 백종현 교수에 있어”
“백교수의 ‘학회 기획’ 문구 삭제 요구 부당”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해 번역해내고 있는 칸트 전집을 두고 또 다른 전집 번역자인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저작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이종훈 춘천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가 백 교수를 비판하는 글을 <한겨레>에 보내와 전문을 싣는다. 공론인만큼 애초 기고문에서 존칭과 경어체는 생략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한국칸트학회(이하 ‘학회’)가 기획해 출간하기 시작한 칸트 전집에 관한 <한겨레> 기사를 읽고, 무척 망설였지만, 논의가 생산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어, 몇 가지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밝힌다. 이 전집에 대해 ‘최초’ ‘정본’ ‘공인’ 등과 같은 표현은 학회나 해당 출판사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인정해 수정할 것이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백종현 교수는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학회가 번역의 주체를 맡은 일은 (…) 적어도 문명국가에서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원전에 대한 해석이 따르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학설이 나오기 때문”이며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 모임, 특정 출판사나 뜻있는 연구소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칸트 전집을 번역하면서 핵심 용어인 ‘a priori’를 번역하지 않고 발음 그대로 ‘아프리오리’로 표기한 것은 (…) 기존의 말에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겨야 번역자의 책무”라며 “‘a priori’는 ‘선차적’(先次的), ‘transzendental’(트란젠덴탈)은 ‘초월적/초월론적’이 가장 적합하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의 주체나 용어의 번역에서 백 교수가 제기한 문제는 그 문제가 발생한 원인도, 이 문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갈 실마리도 전적으로 백 교수 본인에게 있다고 본다.

그 이유를 우선 용어 문제에서 살펴보자.

백 교수는 번역한 책들에서 ‘a priori’를 ‘선험적’, ‘transzendental’을 ‘초월적(아주 드물게 초험적/초월론적)’, ‘transzendent’를 ‘초험적’이라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① ‘a priori’는 ‘선험적’인지 ‘선차적’인지(약 10여년이 흐르면서 이처럼 변화된 견해를 언제 어디에서 밝히셨는지 모르지만), ② ‘초험적’이 ‘transzendental’의 번역어도 ‘transzendent’의 번역어도 될 수 있다는 것인지, ③ ‘transzendental’은 어느 때 ‘초월적’이며 어느 때 ‘초월론적’인지 상당히 애매하다. 특히 ‘론’이 붙을 때도 있고 안 붙을 때도 있는데, 이것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 같은 차이가 있는지 정말 혼란스럽다.

더구나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이라는 것은 궁색한 억지로 들린다. ‘현대’와 ‘근대’를 아우르는 ‘Modern’에다 ‘계승한다’와 ‘벗어난다’는 뜻을 함께 지닌 ‘post’라는 용어가 합성된 ‘Post-Modern(-ity)’를 ‘탈현대’로 번역해도, 그 의미를 살려 ‘해체주의’라 해도 적절치 않기 때문에 ‘포스트 모던(모더니즘)’이라고 써도 이것을 ‘번역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예는 ‘딜레마’(Dilemma), ‘에피스테메’(episteme), ‘헬레니즘’(Hellenism) 등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철학뿐만 아니라 도덕교육 분야에서도 오래전부터 ‘Moral’이나 ‘Sitte’는 ‘도덕’으로 ‘Ethik’은 ‘윤리’로 사용해 왔는데, <도덕(Sitte)형이상학>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왔던 동일한 칸트의 저술을 백 교수가 왜 굳이 <윤리형이상학>이라는 명칭으로 출판하셨는지 지극히 궁금하다.

우리 사회가 격심한 변화를 겪은 1980년을 기점으로 이전 시대의 원로 학자들, 특히 칸트 관련 책들을 저술하고 번역하신 최재희 교수뿐 아니라 칸트와 밀접한 사상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transzendental’을 ‘선험적’(일부는 ‘정험적’)으로 ‘아 프리오리’는 ‘선천적’ 또는 ‘아 프리오리’로 약속해 번역했다. 그들이 이들 용어의 역사적 맥락과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마다 다른 용어를 씀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켰기 때문이다(가령 한국현상학회에서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E. Husserl’도 ‘훗설’ ‘후싸르’ ‘후셀’ 등으로 제각기 표기했었는데, 그 혼란을 막고자 학회 차원에서 ‘후설’로 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백 교수는 이 용어들을 다르게 표기하기 시작했고, 10여 년이 지나자 “‘초월적’, ‘초월철학’이라는 중심 용어의 새 번역어는 처음의 생소함을 벗어나서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순수이성비판> 제1권, 7쪽)고 자평한다. 어떤 학술 용어를 바꾸는 기준이 정확성인지 적합성인지 익숙함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학회에 공식적 논의와 검토를 거치지 않고 어느 개인이 일방적으로 감행하면, 그것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사유혁명’도 아니고, 은사나 선배들의 업적 모두를 일거에 낡은 유물로 낙인찍게 되어, 마치 다른 모든 것은 외면한 채 정권의 탈취에만 급급한 쿠데타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그다음 번역의 주체 부분을 살펴보자.

백 교수가 “(전집 번역은) 학회가 아니라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 나누는 연구자들의 모임, 특정 출판사나 연구소가 주체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곧 현실적으로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의 모임’과 ‘학회’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우리나라의 빈약한 독서 환경에서는 어떤 출판사도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 교수는 서울대학교에 오래 봉직했는데,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그런 연구소를 일찍부터 운영해왔다면, 또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주로 새로운 저술보다 이미 번역된 저술을 새롭게 번역할 때 처음부터 ‘학회’나 ‘뜻있는 연구소’를 통해 함께 작업을 했다면, 이러한 논쟁 자체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 기사 끝에는 백 교수가 “2002년부터 대우고전총서로 번역해왔던 저술들을 확대해 2014년부터 ‘한국어 칸트 전집’을 출간해오고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라는 추신이 있다. 무엇을 바로 잡았는지 다시 읽어보아도 결국 ‘최초의 칸트 전집’이라는 점을 선점하려는 뜻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심성이 삐뚤어졌기 때문일까? 학회가 칸트 전집을 기획한 것에는 백 교수가 일방적으로 혼란시킨 용어를 다시 정비하려는 의도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어느 쪽을 편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기사에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백 교수가 그 회원들에게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항의성 이메일을 보냈으며, ‘한국칸트학회 기획’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요구가 왜 정당한지, 또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도 백 교수와 칸트학회가 이 문제를 칸트의 냉철한 합리성에 입각해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학문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바란다.

결국 백 교수의 번역과 학회의 번역은 나름대로 다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본다. 어떤 책을 선택할지는 소비자의 권리이며, 그 평가는 후학들이나 미래세대의 몫일 것이다. 그래도 ‘상대방의 의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곧 (그와 마찬가지로 틀렸을 경우도 있을 텐데) 자신의 견해가 올바름을 입증한 것이라는 소피스트의 궤변을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극복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아 씁쓸하다.

※이종훈 교수는 서양철학(현상학)을 전공하고, 2011~12년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현대의 위기와 생활세계>,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가기> 등이, 번역서로는 에드문트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전 3권), <시간의식>,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현상학적 심리학>,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경험과 판단>, <논리연구>(전 3권), <수동적 종합>이 있다.

이종훈 춘천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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