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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19 17:56 수정 : 2018.07.20 12:33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트럼프의 외교 횡보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편파적 언론’이 외면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종종 직설적으로 드러낸다는 데 있다. 지난 16일 헬싱키에서 푸틴과 만났을 때도 트럼프는 탈냉전에서 신냉전으로 상황이 악화한 1차적 책임은 미국의 실수에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잠시 돌이켜보자. 동독에서 소련군을 철수하기로 한 고르바초프는 1990년 2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결코 동유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약속과 콜 서독 총리의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자 나토는 거침없이 동진해 동유럽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했다. 2004년에는 급기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삼국까지 포섭해 러시아 국경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1962년 10월, 카스트로와 흐루쇼프가 합작해 쿠바에 소련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 하자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케네디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인류는 핵전쟁 직전에 이르렀다. 만약 지금 러시아가 ‘미국의 팽창주의’를 봉쇄하겠다고 멕시코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감행한다면? 그동안 미국이 주문처럼 외쳐댄 ‘러시아의 팽창주의’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기실 나토의 위협적 동진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반사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뿐인가? 미국은 호전적인 파시스트들과 공공연하게 합작한 친미 정부의 우크라이나에 군사고문단을 보내고 러시아에 강경하게 맞서도록 사주했다. 러시아 국가안보의 핵심 통로인 흑해까지 사실상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들려고 했다. 봉쇄를 넘는 압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기 앞마당에 펄럭이는 미국 깃발에 경의를 표해야 했을까? 1950년대 흐루쇼프가 소련의 공화국이던 우크라이나에 행정적으로 이양한 크림반도를 2014년 푸틴이 강압적으로 “되찾아온” 배경이다.

다시 20세기 중반 미국으로 돌아가보자.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냉전의 개시를 선언한 것은 민주당 정권이었다. 대조적으로 1969년 7월 닉슨독트린을 통해 중국 봉쇄를 해제하고 결국 소련과도 데탕트를 이뤄낸 것은 공화당 정권이었다. 키신저와 함께 이 역사적 사변의 주인공이었던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중도 사퇴했다. 그는 1950년대 광신적 매카시즘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뒤 그의 국제정치 행적은 위기에 처했던 미국의 헤게모니를 극적으로 회복한 현실주의 외교의 고수로 기억된다. 1960년대 말~70년대 초 마오쩌둥의 중국과 반소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분할통치에 성공함으로써 베트남전쟁으로 수렁에 빠진 미국의 세계적 위상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과연 트럼프는 나토의 동진을 자제하고 유라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중동에서 러시아의 협력을 얻고 중국을 견제하는 다중 포석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 한국으로서는 러시아가 향후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기술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신북방정책의 핵심 파트너로 설정된 상황에서 미국 주도의 경제봉쇄로부터 빨리 풀려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트럼프가 러시아와 신데탕트를 이뤄 제2의 닉슨이 될 가능성은 당장은 회의적이다. 국내의 강력한 반대와 견고한 중-러 연합 전선의 존재 탓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그럴듯한 답은 트럼프의 정치적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칠 11월의 중간선거가 말해줄 것이고,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미국의 경제 상황은 현재로서는 트럼프에게 불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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