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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6 17:48 수정 : 2018.07.27 09:36

출처 : 언스플래쉬 @samsonyyc

인연
무더위가 장례식장 안까지 스며들었다. 추모객들은 숙연하다. 두런거리는 말소리들에 섞여 가장 서러운 말이 들린다. “그깟 4천만원 때문에, 40억도 아니고 4억도 아닌 4천만원 때문에.”

노회찬은 내게 영원한 ‘대표’다. 진보정당추진위 대표 이래 굳은 호칭이다. 그가 사무총장이던 시절, 청년 학생 담당이던 나는 그에게 강연 자리를 알아봐주곤 했다. 그게 유일한 수입원이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학원 강사 하면서 좀 먹고살 만할 때 그의 강연을 들었다. 뒤풀이에서 “한달 톨게이트비로만 수십만원이 나갑니다” 한다. “그 톨게이트비, 제가 댈게요.” 다달이 후원했다. 가난을 못 이긴 죄 닦음이었다. 그런 게 불법 후원인지 모르겠다.

진보신당이 쪼개지고 그와 갈라서면서 후원을 끊었다. 야속했다. 국회의원이면 그 정도는 없어도 될 거라 위안 삼았다. 정의당 당원이 되고도 그는 멀찌감치 지켜보는 정치인이었다. 지금 4천만원 소리에 가슴이 막힌다. 억울하고 원통하다.

자살
처음 소식을 접하고 황망하다 이내 분노했다. 자살이라니, 비겁하다 생각했다. “나는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나아가라”를 읽고 오열했다. 회피하는 자살과 선택하는 죽음은 다르다. 화가 난 것은 그가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고 여겨서였다. 제 양심과 명예를 위해 당을 버렸다 생각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을 확인하고 개인에게 무한대의 책임을 떠안긴 게 죄스러워 울었다.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죽을 게 분명한 선택을 한 것은 어떤가. 자살인가 의로운 죽음인가. 신념이나 조직, 뭇 삶을 위해 선택한 죽음은 그게 어떤 형식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에게는 적이 많다. 잔치국수로 비웃거나 환호하는 사진으로 죽음을 우롱하는 ‘공인된’ 적뿐만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분당과 통합진보당 사태로 민족주의 진영의 적이 됐다. 진보신당 분당으로 ‘좌파’와 적이 됐다. 배신자부터 기회주의자, 출세분자 따위 오명들을 덮어썼다. 그는 진보정당을 다수파로 만들고 싶어 한 사람이다. 대중정당, 수권정당을 만들기 위해 ‘좌의 좌’와 단절하고 ‘좌의 우’로 달렸다. 어제의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을 진보 키우기로 갚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 중심에 케이티엑스(KTX) 해고노동자와 백혈병 걸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결단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홀로였다. 제자들은 잠들었다. 노회찬도 혼자였다. 머리를 보완했던 이재영, 팔다리를 대신했던 오재영은 먼저 떠나고 없다. 고락을 같이했던 과거의 동지들도 없다. 집을 나선 마지막 밤, 홀로 그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내게서 이 잔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아침에 국회를 찾은 건 왜일까. 유서를 쓰려고 들른 걸까. 지독한 고독 끝에 그는 냉정한 결단을 내렸다. 인생을 바친 진보정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했다.

별-바람, 노회찬들
조국이 운다. 후원회장이던 후배가 운다. “어느 날 밤 하늘에 새로 빛나는 별이 있으면, 의원님이라고 생각할 것”이라 썼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괴로워 스러진 그가 어떤 바람도 그저 스치울 뿐인 별이 되었다. 존경하던 호찌민처럼 진보를 상징하는 존재로 부활할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 당장은 그처럼 원칙 있는 부드러움을 구사할 대안은 없다. 오늘 이 커다란 슬픔의 무리들에서 ‘노회찬들’을 본다. 그들은 한 사람이 홀로 책임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수십, 수백, 수천의 노회찬들로 당당히 오시라.

우한기 정의당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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