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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8 18:31 수정 : 2019.02.18 19:32

홍순민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한 나라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도시가 수도이다. 수도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조선의 왕도 한성부에서는 ‘광화문 앞길’(光化門前路)이 바로 그 공간이었다. 뒤로 백악산과 더 멀리 북한산이 받쳐주는 앞에 광화문이 맞아주고 있었다. 길의 동서 양편 신하의 자리에 의정부와 육조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왕조 국가에서는 국정 운영의 중심이 궁궐이요, 궁궐 정문 앞이 왕도의 중심 공간이었다.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왕화(王化)가 나가는 곳이요, 백성들의 소원(訴願)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 앞은 넓은 길인 동시에 너른 마당이었다.

대한제국이 되면서 중심 공간이 경운궁으로 옮겨갔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이 길의 이름은 ‘광화문통’(光化門通)이 되고, 조선총독부 청사가 주인 노릇을 하면서 식민 통치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해방 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청을 거쳐 중앙청이 되었고, 이 공간은 국가 상징 거리로 거듭났다. 하지만 거리와 건물들이 파괴되고 새로 서면서 역사의 흐름은 끊어졌다.

2009년에 이 공간을 새로 꾸몄다. 전후좌우 넓은 도로로 둘러싸인 가운데 광화문광장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거대한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들여앉혔다. 광화문광장을 조성할 당시 광화문의 역사 회복, 육조거리 풍경 재현, 시민 참여, 한국의 대표 광장 등을 표방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이제 이 공간을 다시 꾸민다고 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설계 공모를 하여 당선작이 선정되었다. 이왕 새로 꾸민다면, 그리고 역사성을 되살린다고 한다면 한가지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다. 곧 광화문 월대를 조성하고, 해태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옛 건물들 가운데 의식행사를 치르는 주요 건물에는 월대(越臺, 月臺)가 있었다. 월대란 기단(基壇)을 건물 앞에 넓게 조성한 부분을 가리킨다. 월대는 마당과 건물을 연결하여 의식행사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월대는 품격이 가장 높은 건물에만 있었다.

궁궐 정문에는 예외 없이 월대가 있었다. 광화문에도 물론 월대가 있었고, 다른 궁궐의 정문들과 달리 월대 앞 좌우에 해태가 한쌍 놓여 있었다. 궁궐의 영역임을 드러내면서 누구든지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지다.

그런데 지금 그 월대는 알아볼 수 없게 노면에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정도요, 해태는 제자리를 잃고 광화문 바로 곁에 놓여 있다. 광화문과 광화문광장은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10차로나 되는 사직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으로 바로 갈 수가 없다.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녀 차분하게 바라보는 것조차 어렵다.

공간이 연결되지 않는데 시간이 연결되기 어렵다. 시간이 연결되지 않는데 역사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공허하다. 광화문 앞 공간을 새로 꾸민다면, 역사성을 회복한다고 표방한다면 최소한 광화문과 그 앞 공간을 연결시켜야 할 것이요, 그러려면 월대를 되살리고 해태를 제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출발점이요, 최소한의 요건일 뿐 완결은 아니다. 이 공간에 옛 건물들을 모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일이다. 왕조 시기의 모습을 되돌리려는 의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 공간이 어떤 곳이며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 찬찬히 생각하며, 어렵더라도 널리 시민들의 중지를 모아 꾸며가야 할 것이다. 서양의 광장을 베끼는 것도 옳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서울의 특성이 담겨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고, 마음이 모이고, 염원과 지향이 모여서 한 줄기 흐름을 형성하는 마당, 놀이와 잔치가 벌어지는 대한민국 서울의 마당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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