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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4일 오전 국회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 반대 대국민 담화 발표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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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의 정치막전막후 45]
정치의 세 가지 ‘싸움의 기술’
선방과 카운터 펀치, 물고 늘어지기
이들을 관통하는 힘은 ‘메시지’
황교안 총리 담화에 치명적 빈 틈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주장
임시정부 법통 계승 헌법 전면부정해
야당의 무기는 ‘말과 집요함·설득력’
야당의 교과서 싸움은 쉽지 않지만
싸우지 않는 야당은 야당이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면에서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상식과 비상식이 본질인 이번 사안이 지지정당에 따른 정쟁의제로 변화하는 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맞받아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는 국정화 찬성 여론이 훨씬 높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교과서 의제는 야당이 벌인 싸움이 아닙니다. 주도권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쥘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박근혜와 김무성은 고수들입니다. 두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싸움꾼입니다. 지금 야권에는 싸움꾼이 별로 없습니다. 박지원 의원 정도가 있지만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방송 인터뷰를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치판에서 체득해야 하는 몇 가지 싸움의 기술이 있습니다.
첫째, 이른바 ‘선방’이 중요합니다. 선방을 날리면 내가 만든 프레임에 상대를 가둘 수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기술의 귀신입니다. 하나회 청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수사 등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였습니다. 상대방은 속수무책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몰렸습니다. 야당은 박수만 쳤습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가 ‘낡은 체제 청산’을 내세웠던 것도 그런 사례입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낡은 체제의 일원이라는 이미지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둘째, ‘카운터 펀치’가 승부를 가릅니다. 카운터 펀치는 상대의 힘과 속도를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과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구사하기가 정말 어려운 고난도 기술입니다.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꿰뚫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의를 거절하며 했던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표현이 그런 사례입니다. 그 한 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에 관심이 없고 권력구조에만 관심을 쏟는 이상한 대통령 이미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이번 역사 교과서 국면에서 야당은 아직 카운터 펀치를 날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정치 지형과 언론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여권은 ‘치고 빠지기’를, 야권은 ‘물고 늘어지기’가 기본입니다. 여당은 힘이 있고 야당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세 가지 기술을 관통하는 핵심은 ‘메시지’입니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호소력을 겨루는 정치에서 결국은 메시지가 승패를 결정합니다.
교과서 논쟁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메시지는 ‘좌파 검인정’ ‘올바른 국정화’입니다. 두 가지 모두 형용 모순입니다.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국정화 찬성은 ‘주장’이 아니라 ‘억지’입니다. 그래서 담론시장에서 밀리는 것입니다.
야권의 메시지는 ‘친일 독재 국정화’입니다. 형용 모순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교과서라는 반격에 취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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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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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정화 드라이브를 무리하게 걸던 정부에서 작은 틈을 보였습니다. 지난 3일 황교안 국무총리의 담화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유엔도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 대해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북한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으로 기술된 역사교과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마치 국가가 아니라 정부단체가 조직된 것처럼 의미를 축소하는 반면, 북한은 ‘정권수립’도 아닌 ‘국가수립’으로, 건국의 의미를 크게 부여해 오히려 북한에 국가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의미를 왜곡 전달하고 있습니다.”
황교안 국무총리의 이런 주장은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뉴라이트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주장과 꼭같은 논리입니다.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3일 오후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우리 헌법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 중심의 무장투쟁만을 내세우며 3·1 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48년 발행된 우리 관보에 대한민국 30년 9월1일이라고 되어 있다.”
1948년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191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 연호를 관보에 사용했다는 설명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인정한 임시정부 법통을 왜 황교안 국무총리가 부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도종환 의원은 물증으로 관보를 제시했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5일 시도당 및 지역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본래 모두발언을 짧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20분 정도 조목조목 황교안 총리의 담화 내용을 비판했습니다. 짧은 역사강의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황교안 총리의 담화는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는데 왜 건국이라고 하지 않고 정부수립이라고 하느냐, 그건 대한민국을 폄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주장은 오래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절 행사를 추진하다가 광복회를 비롯해 독립운동단체의 항의를 받고 흐지부지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번 8·15 경축사에서 그런 표현을 썼다. 광복 70주년이면서 건국 67주년이라고 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성공하면 2017년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배포하고 2018년에는 제70주년 건국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1948년에 우리나라가 건국됐나? 아니다. 그런 주장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제헌헌법을 보면 더 명백하다. 우리나라 헌법의 아버지들은 제헌헌법으로 나라를 건국한다고 하지 않았다. 제헌헌법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했다.”
“1948년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태극기, 애국가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이 있는 정부다. 북한은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논리다.”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하면 어디서 그런 정통성을 찾아야 하나. 해방 이후 남북에 각각 국가가 만들어졌다면 어디서 우리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정통성을 찾을 수 있나. 정부의 주장은 1948년 제헌헌법에 반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반국가적 행위,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다.”
“공개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국무총리, 김무성 대표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에서 건국된 것이냐, 1948년 8월15일 건국된 것이냐.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절 주장을 들으면 지하에서 화를 내실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계승에 대해 굉장히 큰 자부심을 가졌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 한동안 대한민국 연호을 사용했다. 1948년 9월1일 관보 1호가 나오는데 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1일로 명기했다. 그래서 북한보다 우리가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왜 이제와서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하는 것일까. 1948년에 우리나라가 건국됐다면 그 앞에 있었던 일제 식민지 지배 하의 항일운동과 친일활동 모두 다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가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됐기 때문에 독립운동 이후 친일 부역배들은 대한민국에 반역한 사람들이다. 두고두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친일 부역배들이 해방 이후 반공이라는 탈을 쓰고 득세하지 않았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면 그 친일 부역배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하고 있는 국정교과서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설득력이 있지요? 문재인 대표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변호사 출신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성격이 이런 경우에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표의 역사강의와 같은 내용의 자료를 정진후 정의당 의원이 6일 내놓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제2공화국까지, 헌법 전문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임시정부 법통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런 정통성은 5·15 쿠데타 직후에 있었던 1962년 12월의 제5차 개정에서 삭제되었다. 박정희 장군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주도한 것으로, 임시정부가 빠지고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라며 5·16 계승이 추가되었다.”
“임시정부 법통은 유신헌법과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없었다가(제5공화국은 4·19 이념 계승도 삭제), 국민적인 민주항쟁에 따른 1987년 제9차 개정에서 부활하였다. 군사독재 시절과 달리, 민주화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지요?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언론은 <중앙일보>였습니다. 6일치 1면에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1948년 8월15일은 ‘건국절(일)’로 기술되지 않는다. 대신 현재 검정교과서에서 쓰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표현은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뀐다”고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역사 학계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건국 관련 내용을 이같이 정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며 ‘이달 중 확정되는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편찬 기준 심의 때 반영하겠다’고 5일 말했다. 이번 결정은 지난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의 관계를 정부가 나서서 명료하게 해야 한다’며 교육부에 결정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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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16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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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과연 1948년 8월15일을 어떻게 규정할까요. 앞으로 지켜 볼 일입니다. 아무튼 문재인 대표가 물고 늘어진 황교안 국무총리의 ‘1948년 건국’ 주장이 이번 역사논쟁에서 매우 예민한 지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끝까지 국정화를 밀어붙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야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막을 수 있을까요?
앞에서 저는 야당이 사용하는 싸움의 기술은 ‘물고 늘어지기’가 기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치지형과 언론환경이 야당에 불리한 상황에서는 끈질김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전례가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5년 정계에 복귀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습니다.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정권교체론’ ‘지역연합론’ ‘햇볕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언론에서는 그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메시지 전파자로 나서야 했습니다. 1995년 지방선거, 국민회의 창당, 1996년 국회의원 선거, 19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같은 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는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해야 정경유착을 해소하고 중산층과 서민이 잘 살 수 있게 된다.”
정권교체론입니다.
“계층간 차이보다 지역간 차이가 더 큰 문제다. 모든 지역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영남패권주의에 맞서기 위해 호남과 충청이 손을 잡아야 한다.”
지역연합론입니다.
“해님과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했다. 바람이 나서자 나그네는 옷을 더 꼭 붙잡았다. 해님이 나서자 나그네는 더워서 옷을 벗었다. 북한을 개혁하려면 포용정책을 써야 한다.”
햇볕정책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새정치국민회의 사람들은 지겨울 정도로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싫어하는 유권자들도 정권교체론과 지역연합론, 햇볕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정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힘으로 1997년 정권교체를 했습니다.
야당의 무기는 ‘행동’이 아니라 ‘말’입니다. ‘한방’이 아니라 ‘집요함’입니다. ‘폭발력’이 아니라 ‘설득력’입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국면에서 야당에 필요한 전략이 바로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정부의 ‘1948년 건국’ 주장은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친일파의 음모라는 문재인 대표의 논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야당은 이런 메시지 몇 가지를 추려내어 집요하고 일관되게 대국민설득에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교과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 계산 때문에 이번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아버지 박정희와 그 시대를 ‘올바로’ 평가한 국정 교과서가 필요할 뿐입니다. 머릿속이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사람과 논쟁은 어려운 법입니다. 야당의 교과서 싸움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논쟁과 싸움은 정당의 본질입니다. 국민들을 믿고, 상식을 믿고 줄기차게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 야당은 야당이 아닙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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