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일 오후 청와대에서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는 일본이 이날 오전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한 데 따른 조치다. 2019.8.2/청와대 사진 기자단/매일경제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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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막전막후 277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자서전 읽기
국가위기 극복 대통령 리더십 회고
김영삼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변명할 생각 없어”
김대중 “우리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다”
이명박 “최고 경영자 출신 대통령의 역사적 소명”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오후 청와대에서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는 일본이 이날 오전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한 데 따른 조치다. 2019.8.2/청와대 사진 기자단/매일경제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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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팀에서는 IMF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참모들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단안을 내려야 할 입장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게 되면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IMF가 요구할 것은 우리의 경제구조 개혁이었고, 그 과정에는 실업과 기업부도 등 고통스러움이 따를 것이 분명했다. 나는 현재의 경제 위기가 노동법 개정이나 대기업 부도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 자체의 개혁이 늦어졌던 데에도 원인이 있는 만큼, IMF행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를 서둘러 안정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한 11월 21일, 나는 청와대로 한나라당(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신당으로 공식출범) 이회창 후보와 조순 총재,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 자민련의 박태준 총재 등을 초청, 경제난 극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회동을 가졌다.
나는 이날 밤 IMF에 대한 정부의 자금 지원 요청이 발표될 것임을 설명하면서 이해와 협조를 요청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외환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IMF의 긴급 구제금융이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했다. 나는 금융개혁 관련 법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처리해야 한다고 당부했고, 참석자들은 각 당의 정책위의장이 협의해 정기국회 회기 중 처리키로 의견을 모았다.
11월 22일 오전 10시 나는 ‘경제 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 경제 회생을 위한 정부의 대책을 설명한 뒤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 경제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동남아 국가들로부터 출발한 금융시장 위기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맞물리면서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많은 걱정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우리 경제는 그동안 비교적 순탄하고 빠른 성장을 가져왔지만, 이와 같은 고도성장 그 자체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개발 연대의 유산인 고비용·저효율의 구조 아래서 제조업의 성장이 한계에 부닥치자, 최근 많은 대기업이 도산하면서 금융기관이 그 부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아직 미흡합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경제 환경이 변하고, 과거의 경제 운용 방식에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해 당사자의 반발을 의식하여 보다 과감한 개혁에 주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운 경제 난국 극복은 그 성패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여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12월 3일 밤, 우리 정부와 IMF는 ‘대기성 차관 협약을 위한 양해각서’에 최종 합의했다. 임창렬 재경원 장관과 깡드쉬 IMF 총재가 조인했다. 이 양해각서에 따라 IMF 등 3개 국제금융기구 지원금 350억 달러와 미국·일본 등 7개국의 협조 융자 200억 달러 등 총 550억 달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12월 5일에는 IMF의 첫 자금 지원으로 55억 달러가 들어왔다.
나는 아픔을 삼키며 IMF 양해각서를 수용했다. IMF의 구제금융에까지 이른 것은 많은 원인이 있었겠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나는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장 어려운 그 시점에 내가 있었고, 나는 기꺼이 아픔을 감내하려 했다.
회견을 마치고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국회로 돌아오니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민주주의와 정치 진보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김 당선자께서 위대한 승리를 한 데 대해 축하와 존경을 보냅니다.”
축하 인사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덕담만 나눌 수 없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에게 IMF와의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경제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졌다며 미국의 협상단을 신속하게 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클린턴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당선자와의 첫 통화인데 무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란 나라 전체가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어서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도 전화로 나를 찾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당선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지만, 그것보다는 한국을 돕겠다는 말이 더 귀에 들어왔다.
충격이었다. 나라의 금고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 파산할지 몰랐다. 기가 막혔다. 국가 운영을 책임진 사람들의 큰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일국의 부총리가 풀이 죽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나라 살림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진정 몰랐다. IMF의 구제금융으로도 국가부도의 위기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22일 아침, 김기환 대외협력 특별대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 대사는 미국의 정·재계 주요 인사를 두루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우리의 외환위기 실체와 미국 정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 대사는 “연말 외환 보유액이 마이너스 6억 달러에서 플러스 9억 달러로 예상된다”는 한국은행의 자료를 보여줬다. 믿기지 않았다. 연말이라면 열흘도 남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이게 맞습니까?”
김 대사는 이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어찌하면 미국이 우리를 돕겠냐고 물었다.
“미국은 ‘IMF 플러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 그 핵심 내용이 대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입니다.”
모두 지난 12월 3일 IMF와 맺은 협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에게 당시의 협약 이상의 개혁적 조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나는 정리해고제 도입에 대해서는 선거 기간 동안에 2년간 유예를 약속했었다. 만약 이를 수용한다면 노동계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몇십만명의 실업자를 구하려다 4천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맞을 수는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외환위기의 급한 불은 껐지만 금융시장은 불안했다. 한국을 보는 국제사회의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신인도 회복을 위해서 노동의 유연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계의 반발은 거셌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다. 나는 이미 노동계의 모든 현안을 협의하고 조정하기 위해 노사정협의회를 만들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상생의 길을 찾는 기구를 탄생시킨 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노조와 사업주 모두의 희생과 협력 없이 외환위기는 극복할 수 없었다.
금 모으기 운동은 시작하자마자 그 반향은 엄청났다. 시민단체와 방송사들이 참여하여 1998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전국에서 무려 350만명이 226톤의 금을 내놓았다. 당시 시세로 21억5000만 달러어치였다. 모아진 금은 수출하여 달러가 들어왔다. 1998년 2월 수출이 21%가 급증하여 무역 흑자가 32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중 금 수출액이 10억5000만 달러였다. 빈사 직전의 나라에 백성들이 수혈을 했다.
그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 세계가 감동하여 한국을 돕자는 기운이 일어났다. 한국의 이미지가 새로워지고 대외 신인도에도 효과가 미쳤다. 금 모으기 운동 소식은 전파를 타고 지구촌에 퍼졌다. 세계가 한국의 미래를 믿기 시작했다. 그 후에 만났던 장쩌민 중국 주석,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는 하나같이 탄복했다.
“경이로운 일이다. 저런 국민이 있는 나라는 도와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돕자고 했다. 한국은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 확신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 외채를 막는 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나마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쳐 있는 국민 여러분의 협력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 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위기 발생 보름 만에 많은 국가들이 국가부도의 위기에 직면했다. 대외의존도가 유난히 높은 한국도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됐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환율은 치솟았다. 해외 언론들조차 한국은 검은 9월로 향하고 있다며 한국의 외환위기설을 보도하고 있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다. 특히 위기 국면에서는 경제 심리가 악화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나는 참석자들에게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꾸 그런 식으로 심리적 불안을 키우면 일어나지 않을 위기도 일어날 수 있어요.”
1997년 외환위기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당시 2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2만개가 넘는 회사가 도산했다. 경제적 곤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수많은 가정이 파탄을 맞았다.
크루그먼도 언급했듯이 그동안 커진 경제 규모로 볼 때 2008년에 외환위기를 맞았다면 피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우리 경제는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이런 시기에 CEO 출신인 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는 역사적 소명이 있을 것이라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로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불신이 크게 해소됐다. 우리는 외환위기의 문턱에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 외환시장과 증시도 즉각 안정세를 되찾기 시작했다. 10월 29일 1,427원까지 올랐던 환율은 다음 날 1,250원 수준으로 급락했다. 주가도 968포인트에서 1084포인트로 하루 만에 12%나 상승했다.
2009년 3월 24일, 정부는 28조 9000억원에 달하는 추경을 편성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의 두 배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2009년 1월 2일, 나는 신년 국정 연설에서 ‘비상경제 정부’ 구축을 천명했다. 일상적인 정부 운영으로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8일, OECD는 회원국의 2009년 경제 성장률과 2010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발표했다. 선진국인 주요 7개국 모두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미국과 영국은 각각 -2.4%, -5.0%를 기록했다. 프랑스 -2.2%, 독일 -5.0%, 캐나다 -2.6%, 일본 -5.0% 등 빨간색 일색이었다. 대다수 OECD 국가들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은 0.2%를 기록해 호주, 폴란드와 함께 예외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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