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희 씨에게 누비는 새로운 기회의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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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통영 누비원단 디자이너 정숙희 씨
방방곡곡 장인들 몰려 군수품 생산
여인들 정성 듬뿍 ‘통영 누비’ 명성 화학섬유 중국산 밀려 한때 사양길
지역 화가·디자이너·장인들과 협업
현대적 문양·젊은 디자인으로 ‘특허’ 정씨는 최근 경남공예대전에서 누비에 옻칠을 해 만든 가방을 출품해 특선을 수상했다. 그는 허접한 중국산 누비천 제품이 국내 시장을 휩쓸던 5년 전부터 통영 누비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섰다. 현대적 디자인에 방수 내피까지 장착한 가방 등을 고급 호텔과 면세점, 국립박물관과 예술의전당 기념품점, 심지어 청와대 사랑채까지 진열해 우리 공예품의 수준을 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섬유나 디자인을 정식으로 전공하지는 않았다. 여상을 졸업한 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그에겐 통영 여인네의 진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이전되면서 통영 누비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통영에 주둔한 군인들의 군복용으로 누비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덕분이었다. 통영은 중앙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각종 군수품을 조달했다. 통영의 여인들은 누구나 누비의 장인이었다. 남편과 아들의 군복을 스스로 만들어 입혀야 했기 때문이다. 누비는 다른 바느질에 비해 시간과 기술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뒷면이 안 보이기 때문에 뒤에서 바늘을 꽂아 올릴 때 정확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면 비뚤어지기 십상이다. 일직선으로 땀새가 고르게 되려면 숙련이 필요하다. 아무리 실력 있는 장인이라도 폭 50㎝, 길이 5m짜리 천 2~3개를 누비면 하루가 다 가버린다. 그나마 1960년대 일본에서 건너온 미싱을 이용한 기계누비가 널리 퍼지면서 통영의 전통 누비는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누비질을 하면 섬유의 수명이 20배는 길어져요. 그만큼 누비옷의 수명도 길어지는 셈이죠.” 통영 누비의 전통은 80년대 한 장인이 재봉틀에 쓰이는 특수 노루발(재봉틀 톱니 위에서 바느질감을 누르는 부품)을 만들어 보급하며 다시 살아났다. 기존의 누비보다 2~3배 촘촘히 박을 수 있는 노루발은 전국 누비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값싼 중국산 누비천이 물밀듯 들어오며 다시 위기를 맞았다. “운 좋게도 저한테는 틈새시장이 보였어요. 통영의 전통 누비를 소재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보급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정씨는 통영 어시장에서 해산물을 팔던 어머니를 설득해 점포를 정리하고 조그만 누비 공방을 차렸다. 바늘로 한땀 한땀 뜨는 것이 아니라 재봉틀로 만드는 누비라, 기술보다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중국산 누비는 컴퓨터 재단을 도입해 2~3줄씩 한꺼번에 박았지만, 통영 누비는 한줄씩 박는다. 그래서 그만큼 수공이 필요하다. 통영의 여인네들은 끈기있게 재봉틀에 매달렸다. 통영 누비의 섬세한 손기술로 바느질 땀수를 촘촘하게 누벼 오래 사용해도 늘 새것처럼 윤기가 나게 만들었다. 여기에 정씨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했다. 통영 출신의 전영근 화백(전혁림미술관 관장)의 그림과 뉴욕 출신의 이수련 디자이너의 작품, 그리고 조성연 누비 장인을 함께 모아 전통 누비에서부터 현대적 감각을 지닌 다양한 소품들까지 만들어내는 연출 솜씨를 발휘했다. 통영 전래의 정교한 누비가 기하학적 문양과 만나 독특한 색감과 미감을 창조해낸 것이다. 정씨는 지난 1년간 전북무형문화재 박강용 옻칠장으로부터 직접 옻칠을 배워 누비 원단에 옻칠을 접목했다. 특허 신청도 냈다. 옻칠을 한 누비천을 이용한 가방과 핸드백 등은 뛰어난 내구성을 보장한다고 한다. 최근엔 통영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누비 원단도 생산했고, 누비 원단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소품도 만들었다. 진주 비단을 원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누비와 관련된 여러 상상력이 마구 생겨나네요. 통영 누비를 꼭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들고 싶어요.” 400여년 전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용맹함을 지켜줬던 통영 누비가 화려한 명품으로 세계 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통영/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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