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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5 18:38 수정 : 2020.01.06 09:08

[짬] 에세이 작가 장석주 시인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만난 장석주 시인.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색채의 향연>(호미). 장석주 시인이 최근 낸 에세이집이다. 16개의 색을 두고 자유롭게 생각을 펼친 책으로 시인의 104번째 저작이다.

시인은 1993년부터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해마다 5000~6000매 원고를 쓰고 강연도 많이 한다. 지난해만 책 5권을 내고 강연은 80회가량 했단다. 강연 수입이 제법 돼 세금도 많이 낸단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20매 안팎을 써요. 책은 하루 한권 읽기를 목표로 하죠. 글의 질은 인풋(읽기)의 양과 밀도에 좌우되거든요. 재작년에 낸 글쓰기 책은 집필을 위해 글쓰기 책 100~200권을 읽었어요. 지금도 한해 500~600권의 책을 삽니다. 기증본까지 매년 책 1천권이 늘어요. 경기 안성 집에 3만권, 지금 사는 파주 집에 7천 권이 있죠.” 3일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의 한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색채의 향연> 표지

쉬지 않고 읽고 쓰는 이유를 묻자 그는 “재밌어서죠”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책 이야기였다. “독서는 뇌에 자극을 줍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어요. 뇌의 생태계는 끊임없이 자극을 줘야 건강해집니다. 인지신경과학자 매리언 울프가 <다시, 책으로>(2019)에서 그러더군요. 디지털 기기 사용자는 다시 책을 읽기 힘들다고요. 뇌가 달라져서죠. 글쓰기도 쉬다 하면 힘들어요. 막막하죠. 계속 쓰다 자리에 앉으면 뭐라도 나와요. (미국 작가) 헤밍웨이도 습관처럼 매일 아침 썼어요.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면 자신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해요. 사냥처럼요. 이렇게 쓰는 사람들의 생산력이 높아요.” 책을 놓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단다. “제가 모자란다는 걸 아니까요. 석학들의 책을 읽고 제 안의 무지와 미숙이 깨지면서 오는 전율과 기쁨이 큽니다. 압축해 말하자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죠.”

경기상고 2학년 때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만 스무살인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시인 호칭을 얻었다. 오로지 독학의 힘으로 출판사(고려원) 편집자가 됐고 81년엔 청하 출판사를 차려 니체와 장 그르니에의 책과 서정윤의 베스트셀러 시집 <홀로서기> 등을 냈다. 돈도 많이 벌어 압구정동에 사옥까지 올렸지만 93년 출판사를 정리했다. 고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발행인이었다는 이유로 61일 동안 옥에 갇힌 다음 해였다. 그는 음란문서 제작 및 반포 혐의를 받았다.

시인은 스스로 ‘리버럴한 개인주의자’라고 했다. “고교를 그만둔 것도 교련 시간에 집총을 거부해서죠. 그 때문에 교련 선생에게 구타당한 뒤 학업에 흥미를 잃었어요. 어차피 글 쓰고 살 거니 졸업장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학교를 나와 이듬해부터 서울시립도서관 참고자료실 창가에서 책만 읽었죠.” 구치소에 두 달 있을 때도 책을 42권이나 읽었단다.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시인은 출판사 대신 전업작가의 길을 택했다. “출판사를 하면서 많이 지쳤거든요. 사람 상대하는 일도 그렇고 번잡한 일이 많았어요. 읽고 쓰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인데 그걸 하지 못하니까요. 지금은 <즐거운 사라>로 겪은 트라우마는 다 극복했어요.”

이번 책도 장석주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글쓰기가 빛을 발한다. 그는 책 서문에 “색의 향연 속에서 우리 감정은 화사해질 수 있었다. 세상이 온통 잿빛이었다면 인생도, 사랑도 그렇게 빛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시인은 노랑에서 둥근 귤을 떠올리고는 그 연상을 ‘둥근 것의 궁극을 지닌 존재’인 어머니로 확장한다. ‘빨강의 아우이고 분홍이나 노랑과는 자매 사이’인 주황을 두고는 늘 그 주변에 상생의 기운이 감돈다고 썼다. 그에게 분홍은 ‘어린 누이의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 꽃빛 그리고 어린 누이가 웃을 때마다 드러나던 잇몸’이며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신기한 나무와 같은’ 이모와 맞닿는 색이다.

최근 104번째 책 ‘색채의 향연’ 내
 “생명의 밝음 은은한 주황 좋아해
색에 대한 관대함은 열린 마음”

즐거운 사라’ 발간으로 고초 겪어
93년 출판사 넘기고 전업작가 길
“매일 쓰는 작가가 생산력 높아”

“6~7년 전에 청탁받지 않고 그냥 쓴 글입니다.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인상은 색이나 형태가 좌우합니다. 시인이니 더 색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어느 순간 색이 시각을 넘어 오감 영역으로 확장하더군요. 그때 받은 강렬한 느낌에서 글이 시작됐죠.”

시인은 어릴 때 화가를 꿈꿨단다. “중학교 때 미술반 활동을 했어요. 화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고교에 갔는데 부모님 반대가 컸어요. 가난하게 산다고요. 문학은 안 보이니 부모님이 막을 수가 없었죠. 20대 초반에도 혼자 유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출판사를 할 때도 디자인은 제가 거의 다 했어요.”

‘편애하는 색’은 주황이란다. “가방을 살 때도 내 눈길을 잡아끄는 색은 압도적으로 주황이 많았어요. 생명의 양명함(밝음)을 안에서 비춰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피부 살갗 아래 등불이 켜져 있는 것 같죠. 생명의 밝음이 은은하게 흐르는 색이죠. 의기소침하고 음울했던 20대엔 회색을 좋아했어요. 옷도 회색을 많이 입었고요. 지금은 훨씬 밝게 입어요.”

한국 사회가 색에 대해 더 관대해졌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색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이고 편협하죠. 거리에 나가 차를 보세요. 패션계나 각 분야의 프런티어 정도나 색에 대한 촉수가 발달했죠. 사회 전반으로 번지지는 않았죠. 아직도 금기와 억압이 짓누르고 있어요. 정치권이 대표적이죠. 흑백논리와 극단적 진영논리만 있어요. 내가 가진 색에 대한 집착과 편애가 강하죠. 상대한테는 배타적 분노를 표출합니다.” 시인은 색에 대한 관대함은 열린 마음이라고 했다. “나와 다름에 대해 더 많이 포용해야죠.”

모르는 것을 알아갈 때 시인은 큰 즐거움을 얻는다. “책을 정말 다양하게 읽어요. 우주, 물리학, 진화생물학, 뇌과학까지요. 박문호 선생이 지난해 쓴 <생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도 엄청 어려웠지만 3분의 1가량 읽었어요.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을 때 즐거움이 커요. 앎이 확대되니까요. 요즘은 수학책이 재밌더군요. 젊었을 때 수학 공부를 했더라면 뇌의 회로와 배선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는 또래 친구들이 대입이나 취업을 준비할 때 공립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시를 썼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영국 작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죠. 내 지적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 깨닫게 해줬죠.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윌슨은 한 해 6개월 노동하고 6개월은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아웃사이더>에 담긴 지식의 밀도가 정말 강렬했어요. 23살에는 바슐라르에 대한 김현의 책을 읽고 비평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출판사를 넘기고 안성으로 내려가서는 노자와 장자 책을 100번은 읽었단다. 2001년 처음 만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저술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단다. “들뢰즈 책을 100권은 읽은 것 같아요. 개념들을 직접 만들어 쓰고, 지식의 경계를 넘어 종횡으로 문학과 철학, 수학, 지리, 인류학을 거침없이 건너뛰더군요. 놀라웠죠. 현학에 대한 호기심을 맹렬히 자극했죠. 제 사유의 변화와 확장에도 큰 영향을 주었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1장에서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리좀형 사유를 수목형 사유와 대비해 설명하잖아요.”

장석주 시인.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시인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은? “간결하고 함축적이고 정확한 문장이죠.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분의 문장을 이상으로 삼아요. 그의 사유는 깊고 넓어요. 문장은 그의 정교한 사유를 담아내는 도구이죠. 사유가 넘치는 문장이 김우창 스타일이죠.”

그는 고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정규학력을 끝냈다. 시인과 글쟁이로 사는 데 불편함은 없었을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거나 홀로 모든 걸 만들어내야 하니 생존을 위해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좋은 점이죠. 안 좋은 점도 있죠. 살아오면서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쓰고 있는 시나 비평이 정당한 평가를 못 받는다는 것이죠. 사실 제가 등단하고 30년 동안 문학상을 받지 못했어요. 2010년 받은 질마재 문학상이 첫 수상입니다.”

그의 글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행복은) 일상의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향유하는 능력에 달려 있어요. 오늘 아침 먹은 복숭아 과육이 준 기쁨을 기억할 수 있어야죠. 오늘의 이 조그만 일상의 평화와 안녕이 내일에도 지속하리라는 신뢰도 중요해요. 사회를 그렇게 바꾸려는 노력도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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