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18 20:03
수정 : 2015.04.2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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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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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톡톡
<천일의 약속>(사진)은 ‘김수현 드라마’이다. <불꽃>, <내 남자의 여자> 등을 함께 만든 정을영 연출에 수애와 김래원 주연이건만, 누구의 드라마도 아닌 ‘김수현 드라마’로 불린다. ‘김수현 드라마’는 ‘막장드라마’가 넘치는 방송계에서 일종의 브랜드로 작용한다. <천일의 약속>엔 “티브이 드라마 찍기 싫댔지?” “막장으로 만들지 마라” “쌍팔년도 홈드라마도 아니구” 등의 대사가 나온다. 드라마라는 장르를 철저히 곱씹으면서, 막장이 아닌 드라마를 쓰겠다는 작가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천일의 약속>은 불치병과 불륜, 반대하는 결혼 등 막장드라마의 골격을 갖추었지만,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 불치병을 다루는 방식이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의 소멸이니 충분히 문학적이다. 주 증상도 주관적 통증이 아닌 객관적 행동이상이니 극화하기도 좋다. 그러나 주로 노인병으로 인식되어 치매 걸린 노인을 보는 자식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었다. 젊은이의 치매를 다룬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나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도 있었지만, 주인공의 내면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나 <천일의 약속>은 지식노동자이자 자존심 강한 인물(수애)이 자아의 붕괴에 직면하여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1인칭 내레이션까지 써가며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상황은 신파적이지만, 주인공의 강렬한 내적 갈등이 극을 지배하면서 연민의 정서를 넘어선다.
둘째, 불륜도 불사하는 신념이다. 첫회부터 주인공의 사랑이 약혼녀 있는 남자와의 밀애였으며 결혼에 임박해 이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 불치병 순애보 드라마가 하필 불륜을 전제로 하였을까? 시청자의 동정을 얻고자 했다면, 배신당한 약혼녀가 불치병에 걸리는 설정이 손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도덕적 비난을 받는 관계를 피하지 않는다. 김수현에겐 약혼이나 결혼 유무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원칙이 있다. <사랑과 야망> <내 사랑 누굴까> 등에서도 이혼이나 사별 뒤 돌아온 옛 연인과 결합하는 커플이 많았다. 김수현에게 ‘사랑’과 ‘사랑 아닌 감정’은 분명히 다른 것이어서, ‘정들면 그게 그거’란 타협을 배격한다. 오래 정들었고, 장점이 많은 약혼녀이지만 사랑은 아니기 때문에 결혼 직전에라도 엎는 게 옳으며, 그 구분과 결단이 늦은 게 잘못이지 약혼자 몰래 다른 사랑을 한 것은 큰 죄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김수현 식 사랑관이다. 이런 신념은 이따금 보수적 가족윤리를 넘어선다.
셋째, 전형성을 벗어난 인물묘사이다. 약혼녀는 부잣집 딸답지 않게 자존감이 낮고, 약혼녀 어머니는 고상한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타와 이기의 극단을 표상할 뿐 평면적인 인물들이다. 반면 서연(수애)은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자존감이 강해 결혼을 원치 않는다. 지형(김래원)의 어머니(김해숙)는 이들의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반대를 표한다. 둘 다 이기와 이타를 지양한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그래서 둘의 대화 장면엔 성숙함과 숭고함이 감돈다. 막장드라마였다면 이들의 대화가 얼마나 척박했을까. ‘선악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이해하기. 김수현 드라마와 막장드라마의 차이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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