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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6 19:29 수정 : 2015.04.29 13:49

<출생의 비밀>(에스비에스)

황진미의 TV 톡톡

<출생의 비밀>(에스비에스·사진)은 18부작 주말드라마로, 현재 12회까지 방송되었다. 제목이 ‘출생의 비밀’이고 기억상실을 소재로 삼지만,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출생의 비밀>은 추리극을 연상시키는 서사 방식과 캐릭터들의 개성이 빛나는 수작이다.

1997년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닌 정이현(성유리)은 유학 자금을 빌리려 생부를 만난다. 다음날 깨어보니 2007년 길바닥이다. 십년 기억을 통째로 잃은 정이현은 통장 정리를 통해 현재 자신이 재벌의 조카이자 하버드대학 출신의 금융 투자 전문가임을 알게 된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누리며 살아가던 정이현에게 홍경두(유준상)가 나타난다. 2006년 자살하려던 두 사람이 만나 1년간 동거했고, 그때 낳은 딸이 7살이 되었다고 한다. 정이현은 자신이 왜 죽으려 했는지 기억의 조각을 맞추며 차츰 재벌 비리에 접근한다.

<출생의 비밀>은 멜로드라마와 기업드라마를 오가며, 인간의 실존과 돌봄의 부성애와 자본의 본질을 보여준다.

첫째, 정이현과 홍경두는 계급 차가 크다. 계급은 교육으로 발현된다. 교육은 말투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쳐, 둘은 전혀 안 어울린다. 평소 만날 일조차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자살을 위한 절벽이었다. 정이현은 홍경두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연히 안겼을 때 익숙함을 느낀다. 출산의 기억은 없어도 젖은 붓고 불현듯 산통이 엄습하듯, 몸의 기억은 남는다. 드라마는 둘의 만남을 통해, 죽음과 맞닥뜨리는 존재이자 몸의 존재인 인간에게, 계급과 지성의 차이는 부차적임을 드러낸다.

둘째, 홍경두는 홀로 키운 딸의 교육을 위해 딸을 부자 엄마에게 보낸다. 이는 마치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성 역할이 뒤집힌 판본 같아 보인다. <7번방의 선물> <아빠! 어디 가?> <천명> 등에서 보듯 부성애는 최근 대중문화의 키워드이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의 아버지 열풍이 ‘돈 벌어다 주는 아버지의 실패’에 대한 연민이었다면, 최근의 부성애 열풍은 ‘직접 보살피는 아버지의 재발견’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셋째, 드라마는 줄기세포 개발과 주가조작 등 재벌 비리의 패를 감춰두었다. 서로 경계하고 혈육마저 죽이려는 재벌 가족의 진상이나, 2006년 정이현이 “당신들 모두 악마, 같이 죽자”고 말하며 가출했다는 점만으로도 드라마가 품은 자본의 추악함이 짐작된다. 금융 투자 전문가인 정이현의 말소된 기억이 1997년 외환위기 직전부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 시기인 점도 상징적이다. 천재적인 소녀가 인류를 위한 첨단 과학 분야를 포기하고 ‘착한 부자’가 되기 위해 진로를 바꾼 뒤 추악한 자본의 민낯을 접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홍경두를 만나 살았다. 그러나 다시금 기억을 지운 채 재벌가로 돌아와 투자자들의 돈을 불리는 일을 한다. 이는 망각과 몰아를 동원하지 않고선 그 자리에서 다시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드라마는 “당신은 당신 인생의 가장 행복한 기억을 지운 채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십년 기억을 지운 채 길바닥에서 깨어난 정이현은 바로 작가가 말하려는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이 아닐까. 딸에 의해 모성애를 깨치고, 홍경두를 통해 행복한 기억을 되살려낸 정이현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씨앗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을 깨닫게 될까? <출생의 비밀>은 망각과 몰아를 통해 자본에 충성하는 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되살려 본연의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촉구하는 윤리적인 텍스트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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