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8 19:32
수정 : 2015.04.2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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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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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톡톡
<황금의 제국>(사진)은 <추적자>를 쓴 박경수 작가의 24부작 드라마로 12회까지 방송됐다. <추적자>에서 대통령조차 ‘하찮은 호민관일 뿐’이라고 일갈하던 회장님(박근형)을 기억하는가. <황금의 제국>은 1950년대 시멘트 공장에서 시작해 42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한 성진그룹이 90년대에 맞게 된 후계 구도를 통해, 자본의 작동 방식을 묘파하는 기업 드라마다.
드라마는 태주(고수)가 정치인을 죽이고, 혐의를 설희(장신영)에게 떠넘긴 뒤 성당으로 달려가 서윤(이요원)과 결혼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드라마는 곧바로 1990년으로 돌아가 가난한 태주가 부동산 개발업자 설희를 만나 큰돈을 벌고, 외환위기를 기회로 삼아 성진그룹 후계자 서윤을 압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2회에서 태주는 모든 것을 걸고 검찰에 출두해 설희를 구한 뒤 “선배 뒤에 숨지 않겠다. 이제 내 뒤에 숨으라”고 말한다. 그런 태주가 어떻게 설희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고, 적대적인 서윤과 결혼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이 드라마의 핵심이 있다. <황금의 제국>이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의 윤리’가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다.
1990년 철거 농성장에서 용역깡패와 경찰에 의해 아버지가 불타 죽자, 태주는 “돈 생기면 땅 산 사람들 모두가 책임자야. 여기 있는 사람들도 돈 없어서 못 샀을 뿐, 착한 척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재벌이든 중산층이든 서민이든, 같은 욕망을 가진 이상 선악을 논하는 게 무슨 소용이냔 뜻이다. 그는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한 설희에게 “착한 사람 필요 없어. 나한테 필요한 건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그는 잘잘못을 판단하거나 정당한 값을 매기는 것은 승자의 몫이라 말한다.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 삼아, 매번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벼랑 끝 전술로 ‘풀 베팅’ 하는 담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선인과 악인이 있는 게 아니라,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겁 없는 자와 겁 많은 자가 있을 뿐이다.
회장도 서윤에게 “착한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서윤은 가족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내민다. 가족들은 각자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한다. 명분이나 혈육의 정은 통하지 않는다. 회장은 함께 그룹을 일군 동생과 조카를 매섭게 내친다. 그때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룹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다. 쫓겨난 조카(손현주)는 재기를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은행장 딸과 결혼한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은 남편의 복수를 위해 무려 27년간 회장 부인으로 살아온 한정희(김미숙)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회사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적인 감정을 끊어내며 붙잡은 것은 자본의 자기 보존과 증식 욕망이다.
태주는 외환위기 때 “나라가 흥한다고 내가 흥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가 망한다고 내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보편화된 신자유주의 세계관의 선취다. 그들은 감정도, 선악도, 공동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이상으로 삼는 최후의 인간형으로, 흡사 뱀파이어들처럼 보인다. 인간의 욕망을 비우고, 자본의 욕망으로 자신을 채운 다음, 이를 대리하며 순명하는 그들은 ‘자본의 마차를 끄는 마부들’이다. 그들에 의해 ‘황금의 제국’이 굴러간다. 인간도 신도 말살된 물신의 세계. 황금을 위한, 황금에 의한, 황금의 제국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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