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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05 18:53 수정 : 2015.10.23 14:33

황진미의 TV 톡톡

<풍문으로 들었소>(에스비에스)는 <밀회>(제이티비시)를 만들었던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피디의 최신작이다. <밀회>는 스무살 청년과 사십대 유부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였지만, 단순한 불륜극이 아니었다. <밀회>는 예술과 계급에 관한 드라마였다. 가난한 천재 젊은이가 상류층에 의해 발탁되어 우아한 고급예술의 세계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출현으로 상류층의 위선이 까발려지고 그 세계를 이고 살았던 중년 여성의 존재와 의식이 박살나는 이야기였다.

<풍문으로 들었소>도 초일류 집안 아들과 평범한 집안 딸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지만, 신데렐라 막장극이 아니다. 신데렐라 드라마는 상류층에 대한 선망을 품은 채, 계급 상승의 욕망을 대리하거나 공유한다. 그러나 <풍문으로 들었소>는 상류층의 삶에 풍자의 시선을 드리운다. 그들은 물려받은 최상류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돈이 아닌 품위를 추구한다지만, 그들의 품위는 허위의식일 뿐이다. ‘청춘의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한 열정과 맞부딪치면서 그들의 속물성이 드러난다. 드라마는 사랑의 순도를 높이기 위하여 연인들의 나이를 청소년으로 낮추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재벌가 스캔들을 다룬 여느 드라마와 다르다. 일단 상류층에 대한 질적인 묘사가 강화되었다. 인상(이준)의 집안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다. 법조 명문가로 아버지는 국내 1위 법률회사 대표이다. 전직 총리를 고문으로 앉히고, 총리 내정자 인선에 관여한다. 대한민국 권력과 정보의 핵심이 그의 손에 있다. 그들은 상류층들끼리 사교를 통해 교제하며 혼맥을 맺어 기득권이 분산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 집안에 만삭이 된 봄(고아성)이 들이닥치고, 급기야 아기를 낳는다. 그런데 사건은 스캔들이 아니다. 미성년이긴 하나 그들의 사랑은 죄가 아니며, 아이의 탄생 역시 근본적으론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윤리적 판단을 할 겨를이 없다.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다. 그들은 상류사회에 소문이 날까 두렵고, 자신들의 욕망을 발설할까 두렵다. 드라마는 상류층의 딜레마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둘러싼 일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 <하녀>와 궤를 같이한다. 그들은 아랫사람을 부리지만, 아랫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한다. 최연희는 봄에게 “천박하다”고 소리치다 비서에게 입을 틀어 막힌다. 그들은 봄을 인상과 아기에게서 떼어놓으려 하지만, “인상과 만나게 해달라, 아기에게 젖을 물리게 해달라”는 봄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척해야 한다. 아랫사람들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혼인신고를 막으러 달려간 구청에서도 그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여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봄과 함께 택시를 탄 인상은 키스를 하겠다며 기사의 허락을 받는다. 그의 모든 행동이 부모의 금지와 아랫사람들의 허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흥미롭다.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인상의 가족들은 사실 아무것도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들의 욕망도 인정할 수 없는 지독한 자기분열에 빠져 있다. 반면 봄과 그의 가족들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하다. 드라마는 이러한 역전을 통하여, 사랑과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의해 녹아내리는 얄팍한 위선을 통렬하게 조롱한다. 누구의 욕망인지도 모르는 욕망에 포박된 채 사는 이는 주체가 아니다. 주체가 아닌 자의 권력은 실체 없는 풍문처럼 가볍다. 과연 누가 강자이고, 누가 주인인가.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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