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여성상 보여준 ‘일룡’ 분이

황진미의 TV 톡톡

<육룡이 나르샤>(에스비에스)가 22일 종영했다. 드라마는 재미는 물론이고 역사와 정치에 관한 놀라운 견해를 풀어내었는데, 드라마가 보여준 여성상 역시 획기적이다.

그동안 사극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재현되었을까. <여인천하> <장희빈> 등에서 주인공은 섹슈얼리티를 활용하여 권력을 잡는다. 드라마는 선망과 이해의 시선으로 이들을 그린다. 드라마는 여성 영웅을 그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가장 뛰어난 여성이 왕의 총애를 얻거나 왕자를 낳음으로써 권력을 잡고, 결국 친정 일족을 잘살게 하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 드라마의 배경이 지독한 남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상상은 보수적인 성의식의 반영이다. <선덕여왕>은 전혀 다른 상상을 보여주었다. 미실은 남성과의 관계우위에서 섹슈얼리티를 활용하여 흡사 여왕벌 같은 리더십을 발휘한다. 선덕여왕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귀족의 권력이 아닌 왕권의 강화를 고민하였는데, 이처럼 역사적 대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여성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권력암투와 무관한 여성의 입지전을 그리는 경우도 있다. <대장금> <황진이> <바람의 화원>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전문가나 예술가로서의 여성을 그렸다.

<육룡이 나르샤>의 가상의 인물 분이(신세경)는 ‘육룡’ 중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하층민 여성이지만, 역사적 대의를 각성한 혁명가이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에게 ‘분이 대장’으로 불리던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정보팀을 이끌다가, 왕자의 난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가 공동체의 리더로 살다 죽는다. 분이와 이방원 사이에는 로맨스가 있지만, <동이>나 영화 <도리화가>의 주인공과 다른 길을 간다. <동이>와 <도리화가>는 비천한 출신의 영민한 여성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우정을 쌓으며 재능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후궁이 되거나 권력자의 첩이 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분이는 이방원이 처음 청혼하였을 때 거절한다. 신분의 격차에 황송해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과 첩의 신분을 거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밝힌다. 냉철한 분이에 비해 오히려 이방원이 감정적이다. 그는 신분차를 넘어설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먼저 정략결혼을 하면서도 분이의 감정을 계속 살폈다. 이후 둘은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동지애를 발휘할지언정, 더 이상의 로맨스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분이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을 떠나려 하자, 이방원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연정을 투하하여 “결혼하자”는 말을 내뱉는다. 분이가 억류한 사람들만 풀어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순순히 답하자, 이방원은 자신과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과의 신의보다 하찮음에 충격을 받는다. 분이에게도 이방원과의 감정이 하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신이나 자존심보다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분이는 공동체를 책임지는 사회적 존재로서 놀라운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준다.

분이의 엄마 역시 매우 특이한 모성을 보여준다. 궁녀 출신의 연향(전미선)은 어린 자녀와 헤어진 뒤 무명이라는 조직을 이끌고 살다가, 적대적인 조직의 일원이 된 장성한 자식들을 만난다. 그는 울며불며 끈끈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모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역시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리더로서 냉철한 신념을 보인다. 아들과 딸, 엄마가 뒤늦게 만났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과 조직과 노선에 가족을 편입시키려 들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각자의 이상과 삶을 존중하며, 마지막 순간에 느슨한 연대의 손길을 내밀 뿐이다.

<육룡이 나르샤>가 보여주는 여성적 리더십과 쿨한 모성은 굉장히 신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극중에 녹아들어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놀라운 여성주의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