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19 13:50
수정 : 2016.11.21 14:59
<개그콘서트>(한국방송2)의 인기가 수개월째 하락세다. 꼭지(코너)의 회전율이 떨어진데다, 모처럼 출시한 새 꼭지도 진부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의미 있는 경향을 꼽으라면, 남성성에 대한 조명이다. ‘게놈 프로젝트’, ‘아재씨’, ‘상남자들’은 남성의 허세와 용렬함을 비춘다. 물론 과거에도 남성들의 지질함을 다룬 ‘가장자리’, ‘남자가 필요 없는 이유’, ‘핵존심’, ‘네 가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꼭지들은 남성들의 우스꽝스러움과 나약함을 훨씬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게놈 프로젝트’는 100년 후 남성이 모두 멸종되었다는 가정하에, 남성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연구한 박소라가 기자회견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주로 말해지는 것은 남성의 허세다. ‘아는 형’을 운운하며 인맥을 과시하거나, 기계 등에 대해 아는 척을 하거나, 자신의 외모에 대해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식이다. 끊임없이 외모평가를 당하고 살아온 여성들과 달리 남성들은 대상화를 겪지 않은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자부심이 넘친다. 이 꼭지는 남자들의 허세 넘치는 행동들과 여러 여자들을 ‘어장 관리’ 하며 사귀고픈 욕망으로 가득 찬 남자들의 뇌구조를 여성의 입장에서 풍자한다.
‘아재씨’는 ‘아재 개그’를 남발하는 사람에게서 퇴마사들이 ‘아재 악령’(박영진)을 분리해내는 설정을 지닌다. ‘아재 개그’의 핵심은 썰렁한 말장난을 굉장히 재미있다는 듯 자아도취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가장 큰 웃음이 터지는 대목은 “왜 이렇게 안 웃어? 지금은 안 웃기지? 나중에…” 하며 자신의 유머감각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이는 장면이다. 상호교감이 중요한 유머에 있어서도 상대를 윽박지르는 중년 남성의 자기중심성이 잘 드러난다. 마무리는 구리고 역겨운 ‘아재 패션’이나 ‘아재 버릇’으로 끝맺는다.
사실 ‘아재 개그’란 말의 등장은 그동안 성차적·연령적으로 가장 우위에 있었던 중년 남성들을 웃음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부장님 개그’는 안 웃겨도 호응해주어야 하는 수직적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말이지만, ‘아재 개그’는 안 웃김을 마음 편히 폭로하고 비웃을 수 있는 만만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간 성인남성은 ‘보편자’로 여겨져왔다. 즉, 인간의 기본값이 성인남성이기 때문에, 성인남성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재 팬’ ‘아재 개그’라는 말이 보여주듯, 중년 성인남성들은 ‘아재’라는 비루한 이름을 달고 자신들만의 하위문화를 드러내는 존재로 인식된다. 즉, ‘보편자’의 지위를 잃은 것이다. 그동안 박영진은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 캐릭터로 자기 풍자를 감행해왔는데, 그가 표현하는 ‘아재 악령’은 중년 남성이라는 인간 부류가 대상화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상남자들’은 한없이 위축된 청년 남성의 초상을 그린다. 남자들끼리 카페에 앉아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김기열은 여자친구의 평범한 말을 편집증적으로 물고 늘어져 여자친구의 ‘다른 남자들’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하는 남자다. 심지어 그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엿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서태훈은 김기열을 만류하지만, 곧 그가 온갖 스토커 짓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가장 큰 웃음을 주는 것은 정명훈 캐릭터다. 그는 여자친구와의 만남에서 손해를 보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그 금액이 몇백원이다. 결국 그는 여자친구에게 이를 따져서 헤어지게 되지만, 몇백원을 받아냈다며 흡족해한다. 친구들은 “네가 상남자다”라며 추어준다.
호방함이나 관대함 등 기존의 남성적 가치와 완전히 상반되는 상황에서 ‘상남자’를 운운하는 마무리는 역설적이지만 굉장한 진실을 품는다. 청년실업으로 이성애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남성들 사이에는 여성들은 약자가 아니며, 남성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역차별론’이 횡행한다. 그 예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군 입대와 데이트 비용이다. ‘역차별론’은 고 성재기씨가 활동했던 ‘남성연대’에서 많이 제기되었는데, ‘남성연대’는 이후 ‘양성평등연대’로 개명하였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데이트 비용을 비롯하여 남성들이 당하는 역차별을 시정하는 게 ‘남성들의 연대’를 높이고 ‘양성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데이트 비용 몇백원을 따지는 정명훈의 행동은 구 남성연대, 현 양성평등연대가 표방하는 진정한 남성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꾀죄죄한 정명훈 캐릭터에게 “네가 상남자다”라는 추임새가 돌아가는 것이다. 정명훈 캐릭터는 데이트 비용을 들먹이며 역차별 운운하는 지질한 남성들의 진정한 영웅인 셈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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