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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3 17:52 수정 : 2017.03.03 20:58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초인가족>(에스비에스)은 박혁권, 박선영 등이 출연하는 시트콤이다. 월요일 밤 11시에 30분간 2회 연속 방송되는 편성이 특이해 보이지만, 내용은 극히 평범하다. 회사원, 전업주부, 중2 딸로 구성된 3인 가족. 그들의 집과 아빠의 회사, 엄마의 친정, 딸의 학교가 주 무대이다. 이들은 약간의 갈등을 겪지만, 회차가 끝나기 전 오해였음이 밝혀지고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재미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힘든데, 이런 평범함 자체가 요즘은 드물고 특이해 보인다.

<초인가족>은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의 역설을 첫 회를 통해 밝힌다. 일종의 출사표인 셈이다. 과장인 나천일(박혁권)은 또 승진에서 누락하자 월차를 내고 출근하지 않는다. 중간관리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지만, 하루 종일 자신을 찾는 연락이 오지 않자 초조해진다. 다섯 자매 중 셋째인 맹라연(박선영)은 엄마와 가장 가깝게 지내지만, 엄마에게 가장 허름한 패물을 받자 서운함을 터뜨린다. 나익희(김지민)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또 성적이 딱 중간으로 나오자 분개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고, 누가 그랬어?” 맞다. 열심히 했지만 딱 중간이라는 것은, 중간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함을 뜻한다.

<초인가족>은 제목이나 이름을 통해서도 이 역설을 암시한다. 제목에는 ‘초인’이 언급되었지만, 이들 중 특별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맥 라이언, 나이키 등이 연상되는 이름을 가졌을 뿐, 그저 ‘범인’일 뿐이다. 이들은 이웃이나 친구를 부러워한다. 맹라연은 고액연봉자 남편과 우등생 아들을 둔 우아한 옆집 여자가 부럽고, 나익희는 자신보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단짝이 부럽다. 그런데 여기엔 묘한 수수께끼가 있다. 이들은 어떻게 고액연봉자 가족이 사는 대단지 아파트에, 그것도 옆집에 살 수가 있을까. 자가와 전세, 월세의 차이를 고려해보아도 답을 얻기 힘들다. 맹라연은 어떻게 생활비가 늘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업주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나익희는 단짝의 미모를 부러워하는 평범한 소녀라고 하기엔 너무 예쁘지 않은가. 그중에서 가장 신기한 사람은 역시 나천일이다. 어떻게 그런 ‘널널한’ 회사생활을 하면서, 해고의 공포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아하, 그래서 초인가족이로구나!

<초인가족>의 시대 배경은 언제일까. ‘만년과장’과 ‘주부’가 소시민의 대표직군이었던 시절, 이들이 미래의 대한 불안 없이 안정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시절. 그러니까 <티브이 손자병법>(1987~1993년)이 방영되고, <아기공룡 둘리>(1983~1993년)가 연재되던 즈음이 아닐까. 얼마 전 <아기공룡 둘리>에 등장하는 고길동의 경제력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는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는 만년과장으로, 전업주부인 아내, 아들과 딸, 어린 조카는 물론이고 정체불명의 군식구 셋을 먹여 살린다. 쌍문동에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음반 수집, 낚시, 바둑 등 고급스러운 취미활동을 한다. 그 정도면 상당한 자산가가 아닌가? 지금 기준으로 보니, 확실히 그렇다. 그렇다면 1980년대에는 어떻게 그런 호사를 단지 소시민의 생활로 받아들였던 걸까. <응답하라 1988>에서 보았듯이, 그때라고 해서 모두가 그만한 삶을 누렸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삶이 나와 멀리 있다고 느끼지 않았고, 조금만 노력하면 가까운 장래에 모두 실현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두가 안다. 1995년 ‘세계화’가 국정기조가 된 이후 ‘신자유주의’가 밀려왔다. 1996년 파견·하청·변형근로를 허용하는 노동법 개악이 있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은 일상이 되었고 중산층은 붕괴되었다. 일자리가 감소함에 따라 취업도 힘들지만 붙어 있기도 힘들다. 만년과장으로는 ‘사오정’(45살 정년)의 고비를 넘기도 힘들지만, 그래봤자 자산소득자인 ‘부자 아빠’와 대비되는 ‘가난한 아빠’일 뿐이다. 생활비와 사교육비가 늘면서 딸을 다 키운 중년여성이 반찬값이라도 벌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시장에 나서지 않으면 ‘집에서 노는 여자, 남편 등골 빼먹는 여자’라는 공격을 받기 일쑤이다. 무엇보다 소득과 부동산시장 양극화로, 고액연봉자와 만년과장은 더 이상 옆집에 살지 않는다.

평범함을 지향하며 어떠한 판타지 장치도 두지 않는 <초인가족>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식상의 특징은 인물들이 가끔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낯설게하기’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튀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을까. 혹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오래전에 꿈꾸었으나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득한 이상향임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닐까. 마치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상상 친구 ‘빙봉’처럼, 나천일과 맹라연은 월요병에 시달리다 이제 잠자리에 드는 시청자들의 무의식에 출몰하여, 좋았던 시절의 판타지를 일깨우기 위해 자꾸만 말을 거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울면, 눈에서 사탕이 쏟아질 것만 같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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