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06 04:59
수정 : 2018.10.06 11:46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미스터 선샤인
최근 종영된 <미스터 션샤인>(티브이엔)은 드라마의 만듦새를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일 뿐 아니라, 주제와 시의성의 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드라마는 정치적·문화적 격변기인 구한말을 체감시킨다. 즉 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상태였으며, 이들에게 ‘외세’와 ‘근대’가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방영 초기에 드라마가 식민사관을 표방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가령 노비와 백정의 자식이었던 유진 초이와 구동매가 조선에 돌아와 부모를 죽인 조선에게 복수하는 것을 두고 ‘조선인의 적은 조선인’의 구도를 취한다고 비판하거나, 이완익이 일본의 조선 침탈에 앞서 친일 행보를 보이는 것을 두고 조선인이 식민 통치를 원했다고 보는 시각이냐며 비판했다. 또한 점등식이나 호텔 등 근대문물을 휘황하게 그림으로써 제국주의가 주입한 근대화의 환상을 불어 넣는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관점의 비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지독한 신분질서로 인해 국민 국가로 발전하기 힘든 제약을 지녔으며, 반봉건과 반외세를 동시에 해결해야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드라마는 이러한 모순을 보여주며, 고애신이 ‘호강에 겨운 양반계집’이란 힐난과 “귀하의 조선에서는 노비도 백정도 살만하오?”라는 화두를 끌어안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는다. 또한 신분제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폭압을 거치면서 양반과 상민이 함께 의병 활동에 뛰어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민족과 민족의식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주체화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가공인물인 이완익의 자발적인 친일행보는 다소 과장된 면을 지니지만, 식민통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친일세력의 존재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 <군함도>에 대한 반응에서 보았듯이, 자발적 친일세력의 존재는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들의 존재가 일제의 만행을 부각시키지 못하게 하고, ‘조선인 대 조선인’의 구도를 형성케 한다는 이유로 배척된다. 그러나 식민지배는 피식민의 부역 없이 불가능하다. 또한 근대문물을 휘황하게 그리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수세적인 반응이다. 근대화의 시작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들어있다. “전차는 일본이 놓았지만, 운전은 조선인이 하니까 괜찮다”는 함안댁의 말은 당시 근대화를 둘러싼 다양한 의미의 결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중반 이후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러한 역사왜곡 논란은 무색해졌다. 특히 지난달 30일 최종회에서는 1907년에 외신 기자가 의병의 사진을 찍는 장면을 재현해냈다. 의병들 중 젊은이들은 만주로 떠나고, 나머지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 이어, 에필로그처럼 2년 뒤 만주의 의병장이 된 고애신의 모습과, 1919년의 청년들을 비추었다. 이는 1909년 안중근의 의거와 1919년 3.1 운동을 암시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의병의 존재를 대중에게 불러낸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구체제의 몰락과 근대의 시작을 왕당사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의 관점으로 보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제 대중들은 국권침탈의 이미지로 명성황후의 최후가 아니라, ‘의병사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의병은 독립군의 뿌리이며, 김구와 안중근도 모두 의병이었다.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의하면, 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의병인 셈이다.
이것은 역사바로세우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 제일 갑부로 누가 봐도 친일을 할 집안이지 반일을 할 집안이 아니다”는 대사에서 보듯이, 당시 기득권층 중 상당수가 적극적인 친일파였다. 또한 이들의 기득권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지면서, 근대사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냉소가 만연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고애신의 존재를 통해 독립운동의 뿌리에 유림 등 구체제의 지배층이 일부 개입되어 있으며,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연결지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헛헛하지 않게 알려준다. 고애신의 저택이 일제의 철도건설로 잘려나가는 장면은 안동의 임청각을 연상시킨다. 이상룡 일가, 이회영 일가 등 독립운동에 뛰어든 명문가와 김우락, 김락, 이해동, 남자현, 윤희순 등 여성독립운동가의 존재는 3·1 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주목해야 될 주제이다.
드라마는 역사의 대의를 인식하고 투쟁하는 주체를 여성으로 두고, 그의 주위에 세 명의 남자들을 배치하고 이들 간의 우정을 보여줌으로써 독특한 젠더적 의미를 낳는다. 남성들은 이방인이거나 매국노이거나 방관자에 불과했지만, 모두 고애신에 대한 사랑으로 일본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죽는다. 고애신은 이들 중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으며,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간다. 흔히 대의를 표방하는 남성주체와 그와의 사랑으로 희생물이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보편서사로 인식된다. 또한 여성 한 명을 두고 남성들이 각축을 벌이는 구도에서 여성은 평면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상징적인 역할로 전락하고, 남자들의 활약이 중심이 되곤 한다. 하지만 고애신은 공주가 아닌 전사로 서사의 끝을 장식함으로써, 흔치않은 여성서사를 완성하였다. 거시정치적으로나 미시정치적으로나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