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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30 18:47 수정 : 2018.12.02 11:05

<한국방송> 제공
<거리의 만찬>(한국방송1)은 지난 7월에 방송되었던 맛보기(파일럿) 프로그램이 호평을 얻으면서 최근 정규편성됐다. 4년 전에도 같은 제목의 파일럿 프로그램이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두명의 남성 정치인과 한명의 여성 변호사가 진행했던 정치 토크쇼였다. 올해의 <거리의 만찬>은 현장 정치 토크쇼라는 콘셉트는 그대로 살리되,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전원 여성 진행자들로 진용을 꾸렸다. 파일럿 방송에서는 박미선, 김지윤 박사, 이정미 의원이 출연하였고, 정규방송에서는 이정미 의원 대신 김소영 아나운서가 합류했다. 30년 관록의 방송인 박미선의 노련한 진행과 김지윤 박사의 핵심을 찌르는 논평, 그리고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공감을 넓혀가는 김소영 아나운서가 절묘한 합을 이룬다.

<거리의 만찬>은 여성 진행자들만 출연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란 점에서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케이블도 아닌 지상파에서, 더욱이 정치와 시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여성 진행자들로만 꾸린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정치와 교양을 남성의 전유물인양 인식해온 편견의 소산이다. 걸핏하면 젊은 여성들을 정치 무관심층으로 몰거나, <알쓸신잡>의 출연자들을 오직 남성들로만 꾸렸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진행자들의 성별이 바뀌다 보니, 젠더 감수성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파일럿 첫 회에서 진행자들은 여성으로 겪는 차별을 웃으며 털어놓았다. 여성 정치인에게만 외모 비하가 쏟아지고, 회식 때 우두머리 남성의 옆자리에 앉혀지는 체험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성희롱이다. 젠더 감수성은 이슈의 선별이나 접근 방식에도 차이를 만든다. 케이티엑스(KTX) 승무원 해고, 분단과 망향, 발달장애인 학교 설립, 낙태죄 폐지 등 일반 시사 프로그램이 등한시하였던 문제들을 알아보기 위해, 진행자들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 당사자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다.

파일럿 1회에서 진행자들은 케이티엑스 여승무원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13년 동안 투쟁을 이어왔는지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을 열차의 꽃으로만 간주했을 뿐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철도공사 경영진들과 처절한 투쟁을 벌이는 자신들에게 외모 품평이나 늘어놓던 시민들의 여성혐오를 지적하였다.

프로그램 갈무리
파일럿 2회에서는 고성군 주민들을 만나 남북 철도를 잇고 공동어로수역을 만들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경청하였다.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감정적인 통일논의보다 평화공존과 교류·왕래의 확대가 추구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심리적인 분단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언급된다. 그 어떤 통일전문가를 모시고 고견을 듣는 것보다 유익한 토크 기행이었다.

정규 편성 후 프로그램은 더욱 예리하고 단단해졌다. 정규 편성 첫 회에서 진행자들은 발달장애인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호소했던 어머니들을 찾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다. 서울시교육청 소유의 학교 건립 부지에 난데없이 국립한방병원을 짓겠다는 공약을 남발하여 주민들에게 헛바람을 넣은 김성태 의원의 얄팍한 포퓰리즘과 불필요한 주민토론회를 열어 주민들이 혐오와 속물근성을 쏟아내게 한 조희연 교육감의 눈치 보기 행정이 비판되었다. 또한 훈훈한 결말인양 포장되었던 조희연 교육감과 김성태 의원과 학교 설립 반대주민단체와의 합의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학교 설립도 주민 달래기와 거래조건이 필요한 사안으로 만들었다는 따끔한 질책도 덧붙었다.

이러한 토크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2회에서는 좀처럼 다루기 힘든 주제인 낙태죄 문제를 다루었다. 낙태죄 존치의 논리인 생명존중의 가치가 인구 정책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적용되어 왔는지를 짚으며 기만성을 폭로하였다. 아울러 낙태죄의 당사자인 산부인과 의사와 여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경청하였다. 얼굴을 드러내고 낙태의 경험을 들려준 여성들은 낙태죄가 낙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낙태의 위험성과 죄의식만 가중시킨다는 결론을 도출해주었다. 또한 낙태를 줄이기 위해서는 피임의 주도권을 여성이 쥐어야 하며, 아이를 혼자서 낳아 키우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전달하였다.

이처럼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흔히 생각하듯 여성적인 배려와 열린 경청의 태도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같은 비중으로 듣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주효했다. 가령 <까칠남녀>에서 그러하였듯, 반대 의견도 들어보아야 한다며 이상한 남성 진행자를 끼워 넣거나, “정답은 없다”며 메인 진행자가 말끝을 흐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기계적인 중립과 오도된 다양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통일, 장애, 여성의 문제에 대해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고 평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소수자적 관점을 견지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경청의 태도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지 않을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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