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13 19:23
수정 : 2016.06.13 19:23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사이에, 친구는 한식은 별로인데 밥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뜨거운 음식도 차가운 음식도 피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를 데리고 나는 초밥집에 갔다. 친구는 자신의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을 모두 통과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집에서라면 이럴 때에 어떤 음식을 차려 먹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주먹밥과 오차즈케가 차례차례 호명됐다. 음식을 요령껏 간단히 만드는 이야기를 하다가, 요리와 청소와 빨래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일매일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더라는 이야기. 끝냈을 때의 상쾌함과 뿌듯함에 대한 이야기. 나는 글을 쓰다 진전이 없을 때면 손을 시원하게 하고 싶어 설거지를 한다고 말했고, 친구는 정성스레 빨래를 개고 나면 마음이 정갈해진다고 말했다. 마룻바닥 한가운데에 털퍼덕 앉아 빨래를 쌓아놓고 하나씩 하나씩 모서리를 맞추는 친구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 친구가 쓴 시들 중에서 그러나 빨래를 개는 장면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밥을 짓거나, 나물을 무치거나, 이불 빨래를 하거나 운동화를 빨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행주질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시를 읽어본 기억이 드물다는 생각을 했다. 생활 아닌 것들로 거의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시. 작품이 되어본 적 없는 우리들의 생활. 생활이 자랑이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이현승의 시 <생활이라는 생각>)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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