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24 18:49
수정 : 2015.11.2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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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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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0년 1월8일 입대했다. 그달에는 내내 폭설이었다.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 다음으로 지루한 얘기가 군대에서 눈 치운 얘기다. 연병장은 아주 넓었고 눈은 치우고 나면 또 내렸다. 끝도 없는 제설작업 중에 3당 합당 소식을 들었다. 진짜 절망은 하얀색이라는 것을 배웠다. 민주자유당은 처음부터 일본의 자유민주당을 본떠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 거대 여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라고 했다. 신문을 보니 단상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 좌우로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서 있었다. 주군 양옆을 지키는 좌청룡 우백호 같았다.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투사가 첫 번째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군인과 함께 두 번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을 모시고 서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거산(巨山)이었지만 그 뒤에는 더 큰 산이 솟아 있었다. 그는 합당의 명분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라고 해서 어찌 걱정이 없었겠는가? 이 말의 속뜻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가 아니었을까? 호랑이가 먹이를 죽이지 않고 굴로 데려가는 것은 새끼들에게 사냥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호랑이 굴에서 정신을 놓으면 물론 잡아먹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정신을 차린 채로 잡아먹힌다. 그의 적자를 자임하는 정치인들은 지금 유신을 예찬하기 바쁘다. 그는 호랑이를 잡은 것일까, 호랑이에게 먹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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