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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01 18:33 수정 : 2017.06.01 20:23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다음달 초 한국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20억원으로까지 추정된다는 선인세를 두고 뒷말도 나왔지만, 출판사도 이윤을 좇는 기업인 만큼 그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비평이 제 역할을 하는지 여부는 따로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지난주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나온 두 원로 문인의 발언은 하루키 문학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하루키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골 빈 대학생들이 하루키를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소설가 현기영도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이라기보다는 소비향락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들이 전해진 뒤 에스엔에스에서는 두 원로를 비난하고 나아가 한국 문학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요지는 이들이 낡은 문학관을 고수하면서 하루키로 대표되는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문학에 대한 한국 문학의 열등감과 원한의 표출이라는 비아냥에다 ‘한국 문학이 망한 이유를 알겠다’는 식의 극언까지 나왔다.

에스엔에스 사용자가 하루키 독자층과 겹친다고는 해도 거의 일방적인 에스엔에스 여론을 보면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하루키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것은 쿨하고 세련된 태도인 반면 그를 싫어하고 비판하는 것은 촌스러운 노릇이라는 분위기였던 것.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이 자유인 만큼 그를(정확히는 그의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비판이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골 빈 대학생”이라는 식의 ‘막말’이 아쉽기는 하지만, 하루키 문학에 대한 유종호의 비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11년에 낸 책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에서도 그는 “(하루키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 문학”이라고 주장했다. 조정래와 김원우 같은 작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하루키 비판 목소리를 낸 바 있다.

하루키를 싫어하는 게 한국의 원로 문인들만도 아니다. 역시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 일본의 40대 작가 히라노 게이이치로는 한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의 책을 읽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히라노와 하루키의 중간 세대인 소설가 시마다 마사히코도 과거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파울루 코엘류나 스티븐 킹도 그 상을 받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나”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하루키 소설에서 보이는 생활 부재와 역사의식 빈곤, 왜곡된 여성상 등에 대한 비판은 단골 레퍼토리다.

올해 초 나란히 번역 출간된 일본 비평가들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와 <문단 아이돌론>은 각각 하루키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담았다. 이 중 <문단 아이돌론>의 지은이 사이토 미나코는 하루키 소설이 컴퓨터 게임을 닮았으며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로서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 2013년작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주인공의 여자 동창 시로와 구로가 각각 흰색과 검정을 뜻한다는 점을 근거로 이 작품을 일본군 위안부(=검정 치마 흰 저고리) 문제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으로 평가하는 식의 ‘과잉 해석’은 <문단 아이돌론>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의 아류일 뿐 뚜렷한 색채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색채가 없는…> 이후 장편으로는 4년 만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둘러싸고는 또 어떤 소동과 ‘해석’이 이어질까.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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