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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1 17:46 수정 : 2017.12.21 19:11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글 쓰고 책 만드는 이들은 먼저 독자로 출발한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책을 만드는 순환은 독자와 저자·출판인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좋은 책을 읽고 받은 감흥과 영향이 그만큼 좋은 책을 쓰거나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얼마 전 출간된 책 <문주반생기>와 거기 딸린 보도자료를 보면서 새삼 든 생각이다.

“사철제본된 두꺼운 영인본의 마지막 장을 덮었던 그 순간은, 그야말로 개안(開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미약하게나마 실감할 수 있었던, 실로 놀라운 기쁨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 일찍이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문주반생기>를 낸 신생 출판사 최측의농간 편집자들은 2014년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3개월에 걸쳐 이 작품이 실린 <양주동전집> 제4권을 완독한 경험을 이렇게 밝힌다. 문고본 크기로 600쪽 가까운 두툼한 분량이긴 해도 책 한권을 읽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린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1960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무애 양주동(1903~1977)이 자신의 전반생을 돌이킨 회고록. 구한말에 태어났으며 주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이 책은 지은이의 일차적 교양이었던 한문 문장과 어휘가 즐비한데다 그의 전공인 영문학과 서양문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그 맛과 멋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자전과 사전을 비롯해 참고도서 수백권과 인터넷 아카이브를 뒤져 가며 꼼꼼히 해독하느라 품과 시간이 들었던 것. 그런 노력은 이번 책에 달린 1996개 각주가 증명한다.

<문주반생기>는 그동안 얄팍한 문고본 형태로 주로 읽혀 왔으며, 같은 문고본 시리즈에 속한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과 함께 지난 시절 문인·지식인들의 술자리 에피소드를 담은 일화집 정도로 소비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본모습으로 접하는 이 책에서 술자리 이야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의 병탄을 전후한 어린 시절부터 식민지 말기까지를 배경 삼은 이 책에서는 양주동이라는 기념비적 문인 겸 학자의 파란만장한 도전과 호쾌한 성정을 만날 수 있다.

열살 때 어머니가 담가 놓은 술을 몰래 퍼마시고 사흘 만에 깨어났다든가, 도쿄 유학 시절 하숙방을 함께 쓰던 횡보 염상섭과 하루에 백가지 술을 한잔씩 마셨던 ‘백주회’(百酒會) 일화, 역시 도쿄에서 노산 이은상의 하숙에 빌붙어 살면서 ‘마산 수재’(이은상) ‘해서 천재’(양주동)의 자존심을 걸고 기억술 내기를 했던 일, 고월 이장희와 함께 방인근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비싼 침구에 실례를 했던 춘사(椿事) 등은 제법 잘 알려져 있다.

새로 나온 완전본에서는 그와 동거했던 소설가 강경애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자세하고, 한문에서 영문학을 거쳐 향가 연구로 나아간 학문 여정이 진솔하다. 3인칭이라는 개념, 맞꼭지각은 같다는 수학 정리 증명 등에 충격받아 서양 학문을 본격 연구하기로 결심하는 장면, 일본인 학자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해독에 자극받아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로 향가 연구에 매진하게 된 사정 등도 흥미롭다.

“잠 안 오는 밤, 일어나 일수(一穗: 이삭 모양)의 청등(靑燈)을 돋우어 놓고, 지난 시절을 차례로 회억(回憶)하면서, 특히 문학소년 시절과 문단, 학창, 교단생활을 더듬어 몇몇 토막을 이에 점철하여 본다.”

머리말에서부터 느껴지는 옛말 투가 젊은 독자들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책을 출간하기 위하여 출판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고 밝힌 젊은 편집자들의 강렬한 독서 체험을 믿고, 연말의 분주함과 번다함을 <문주반생기>로 씻어 보는 것은 어떨까.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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