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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01 18:33 수정 : 2018.11.02 14:16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歲月如流水(세월여유수)하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김윤식 선생의 편지는 흔히 이렇게 시작하곤 했다. 같은 뜻으로, “세월이 많이 흘렀소”라 쓰시기도 했다. 편지지는 대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이름과 학교 표지가 찍힌 얇은 습자지 재질이었고, 때로는 원고지일 때도 있었으며, 이면지에 간단한 인사말과 용건을 적은 경우도 있었다. 겉봉투로는 서울대 국문과와 농협 서울대 지점 봉투를 혼용했다.

흐르는 물처럼 야속하게 지나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을 당시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이 이승을 떠난 지금은 너무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세월은 가차없이 왔다가는 가버리며, 한번 지나간 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선생이 퇴임 기념 강연에서 많은 시 중에서 하필이면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하신 마음을.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 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지라도/ 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때를/ 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 부분).

송구스럽게도 ‘최재봉 형께’라는 호칭을 앞세운 편지들에서 선생은 여러 말씀을 하셨다. 신문에 쓴 원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마산에서 열린 권환문학제를 계기로 글을 보내면서는 “저도 모르게 이용당하다 버림받은 한 인간(=권환)의 비극”과 “참담한 고독”에 주목했노라는 설명을 곁들이셨다. 고희를 한 해 앞둔 2004년에 원고지에 쓴 짧은 편지는 이러했다.

“한겨레에 글을 쓰는 동안, 최형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일념이었고 또 그것이 즐거웠소. 고적(孤寂) 위에 내리는 정복(淨福)이었다고나 할까. 남의 글 읽고 이해하려 애쓰다가 오늘에 이르렀소. 내년이면 제가 고희(古稀)를 맞소. 마음 어지럽기는 여전하여 안타깝소. 언젠가 내 글을 한두 편 쓸 수 없을까. 그렇게 벼르다 오늘에 이르렀소.”

문학사 연구와 현장비평을 중심으로 200여권의 책을 낸 그이지만, ‘내 글’을 향한 갈증은 내내 떨치지 못했다. 저서 <한국근대문학연구방법입문>을 내고 1999년 8월에 보낸 편지에서도 선생은 ‘연구자와 표현자의 관계’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연구자와 표현자의 동일성은 가능한가.’ 이것이 제가 도달한 화두이지요. 만일 이 문제가 조금이라도 의의 있다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 표현자 되기’의 경지, 그것이 제 고민의 일단이지요.”

찾아보니 선생이 내게 처음 편지를 보낸 것은 1997년 9월이었다. 아마도 <김윤식의 소설 현장비평>이라는 평론집을 다룬 기사를 읽고 쓰신 듯한데, 자식뻘 기자를 대하는 겸손이 놀랍고 민망할 정도다.

“제가 그동안 이런저런 책도 내었고, 또 평론도 썼으나, 이번 최형의 평가만큼 정확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요컨대 제 현장비평의 ‘요점’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최형 자신이 현장비평가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최형이야말로 제가 갖고 있는 허술함을 동시에 꿰뚫고 있지 않을까. 다음 기회엔 최형이 본 그 허점이 지적되어, 제가 좀 더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면 합니다.”

2006년 9월에 보낸, 이면지에 짧게 휘갈겨 쓴 편지는 이러하다. 선생은 그 무렵 내가 출연하던 라디오 방송을 종종 듣노라고 하셨다. “방송 잘 듣고 있습니다. 아직도 문학을 사랑합니다.” 문학을 향한, 그 놓지 못할 사랑을 데리고 선생은 지금 어디쯤 가고 계실까.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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