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선임기자 빈소는 한산했다. 문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한 몇몇 문인의 장례에 견주어서도 빈소의 허전함은 두드러져 보였다. 그 허전함은 고인이 ‘3립’(고립, 독립, 자립)을 표방하며 사반세기 동안 수안보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다시피 한 선택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박태순(1942~2019)은 요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960~70년대에 주로 활동했고, 마지막 소설인 중편 ‘밤길의 사람들’을 발표한 것도 벌써 31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궂긴 소식이 금요일 늦은 오후에 전해진 탓도 있었지만, 신문에서도 그의 부음은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허투루 보내도 좋을 작가가 아니다. 박태순은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신입생으로 4·19혁명을 겪었으며 그때 법대 동급생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의 4·19 체험은 단편 ‘무너진 극장’을 낳았다. 그는 불문과 동기였던 김현이 주도한 ‘68문학’ 동인에 가담하지만, 독문과 동기 염무웅과 함께 ‘창작과비평’의 참여문학 쪽으로 건너온다. 소설집 <정든 땅 언덕 위>(1973)로 묶인 ‘외촌동 사람들’ 연작에서 그는 서울 변두리 거주민들의 애환과 사회 변동을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그 작품은 70년대 농촌을 배경 삼은 이문구의 ‘우리 동네’ 연작의 도시 빈민 버전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을 예비한다 할 수도 있었다. 1970년대의 박태순은 활발하게 소설을 쓰는 한편,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를 조직하고 그 조직을 기반으로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규합하는 현장 활동에도 매진했다. 그는 당시 수집한 자료 등을 정리해서 보고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1970년대 문학운동’(1985)을 발표했으며 2004년에 그 글을 확장·보완해서 세 권짜리 단행본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를 펴냈다. 1979년 무크 <실천문학> 발행에 편집인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또한 르포 작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첫 소설집 <무너진 극장>(1972)에 붙인 ‘작가 후기’에서 그는 “소설이란 하나의 눈”이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눈을 감지 말고 뜨고 있어야 한다”는 다짐을 밝힌 바 있다. 뜬 눈으로 현실을 지켜보고 그 결과를 글로 기록하기 위해 소설 장르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전태일 분신 직후 평화시장 작업장과 모란공원 묘지 하관식, 쌍문동 집, 서울법대 추도식장 등을 찾아 현장을 기록하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전태일 분신 이듬해에 벌어진 광주대단지사건 현장을 찾아 ‘르뽀 광주대단지 4박 5일’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 소설 ‘밤길의 사람들’ 역시 1987년 6월항쟁 참여 경험의 소산이었다. 그러니까 박태순은 한국 현대사의 두 결정적 국면인 4·19와 6월항쟁을 모두 체험하고 소설로 옮긴 거의 유일한 작가인 셈이다. ‘밤길의 사람들’에서도 그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이 아닌 남녀 노동자의 눈을 빌려 항쟁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했다. 1996년 <한겨레>의 기획 연재를 위해 기자와 함께 명동성당을 찾은 작가는 중산층과 학생운동권이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이제부터 쟁취해야 할 게 무엇인가를 알게 했다는 데 그해 6월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밤길의 사람들’을 끝으로 소설에서 물러난 그가 대신 주력한 것이 국토 답사기였다. 기행문 <국토와 민중>(1983)과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 3권, 2008) 등은 그 성과의 일부였다. 1일 오후 빈소에서 열린 소박한 추모식에서 그의 학과 후배이기도 한 김정환 시인은 “4·19 정신을 가장 치열하게 구현한 소설가를 넘어/ 국토 기행 장르를 창조한/ 산문정신의 발”이라고 박태순의 답사 문학을 평가했다. 역시 추모식에 참석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한길역사기행 시절을 회고했다. 소설가 현기영을 비롯해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강형철·현준만·한창훈·오창은·홍기돈·안현미 등 후배 문인들이 고인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러나 마땅히 얼굴을 비쳤어야 할 선후배 문인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쓸쓸한 추모식이었다. bong@hani.co.kr
칼럼 |
[최재봉의 문학으로] 박태순의 눈과 발 |
책지성팀 선임기자 빈소는 한산했다. 문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한 몇몇 문인의 장례에 견주어서도 빈소의 허전함은 두드러져 보였다. 그 허전함은 고인이 ‘3립’(고립, 독립, 자립)을 표방하며 사반세기 동안 수안보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다시피 한 선택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박태순(1942~2019)은 요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960~70년대에 주로 활동했고, 마지막 소설인 중편 ‘밤길의 사람들’을 발표한 것도 벌써 31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궂긴 소식이 금요일 늦은 오후에 전해진 탓도 있었지만, 신문에서도 그의 부음은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허투루 보내도 좋을 작가가 아니다. 박태순은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신입생으로 4·19혁명을 겪었으며 그때 법대 동급생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의 4·19 체험은 단편 ‘무너진 극장’을 낳았다. 그는 불문과 동기였던 김현이 주도한 ‘68문학’ 동인에 가담하지만, 독문과 동기 염무웅과 함께 ‘창작과비평’의 참여문학 쪽으로 건너온다. 소설집 <정든 땅 언덕 위>(1973)로 묶인 ‘외촌동 사람들’ 연작에서 그는 서울 변두리 거주민들의 애환과 사회 변동을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그 작품은 70년대 농촌을 배경 삼은 이문구의 ‘우리 동네’ 연작의 도시 빈민 버전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을 예비한다 할 수도 있었다. 1970년대의 박태순은 활발하게 소설을 쓰는 한편,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를 조직하고 그 조직을 기반으로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규합하는 현장 활동에도 매진했다. 그는 당시 수집한 자료 등을 정리해서 보고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1970년대 문학운동’(1985)을 발표했으며 2004년에 그 글을 확장·보완해서 세 권짜리 단행본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를 펴냈다. 1979년 무크 <실천문학> 발행에 편집인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또한 르포 작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첫 소설집 <무너진 극장>(1972)에 붙인 ‘작가 후기’에서 그는 “소설이란 하나의 눈”이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눈을 감지 말고 뜨고 있어야 한다”는 다짐을 밝힌 바 있다. 뜬 눈으로 현실을 지켜보고 그 결과를 글로 기록하기 위해 소설 장르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전태일 분신 직후 평화시장 작업장과 모란공원 묘지 하관식, 쌍문동 집, 서울법대 추도식장 등을 찾아 현장을 기록하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전태일 분신 이듬해에 벌어진 광주대단지사건 현장을 찾아 ‘르뽀 광주대단지 4박 5일’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 소설 ‘밤길의 사람들’ 역시 1987년 6월항쟁 참여 경험의 소산이었다. 그러니까 박태순은 한국 현대사의 두 결정적 국면인 4·19와 6월항쟁을 모두 체험하고 소설로 옮긴 거의 유일한 작가인 셈이다. ‘밤길의 사람들’에서도 그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이 아닌 남녀 노동자의 눈을 빌려 항쟁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했다. 1996년 <한겨레>의 기획 연재를 위해 기자와 함께 명동성당을 찾은 작가는 중산층과 학생운동권이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이제부터 쟁취해야 할 게 무엇인가를 알게 했다는 데 그해 6월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밤길의 사람들’을 끝으로 소설에서 물러난 그가 대신 주력한 것이 국토 답사기였다. 기행문 <국토와 민중>(1983)과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 3권, 2008) 등은 그 성과의 일부였다. 1일 오후 빈소에서 열린 소박한 추모식에서 그의 학과 후배이기도 한 김정환 시인은 “4·19 정신을 가장 치열하게 구현한 소설가를 넘어/ 국토 기행 장르를 창조한/ 산문정신의 발”이라고 박태순의 답사 문학을 평가했다. 역시 추모식에 참석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한길역사기행 시절을 회고했다. 소설가 현기영을 비롯해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강형철·현준만·한창훈·오창은·홍기돈·안현미 등 후배 문인들이 고인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러나 마땅히 얼굴을 비쳤어야 할 선후배 문인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쓸쓸한 추모식이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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