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4.10 18:41
수정 : 2015.08.04 01:23
근대 이전에 그저 ‘작은 어른’으로서 그에 맞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난’당했던 아이라는 개념은 차츰 고유의 권리를 부여받고 사회의 특별한 보호와 관심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위상의 변화를 겪었다. 아이는 사회의 미래로, 나아가 인류의 미래로 그려진다. 공익광고 포스터를 만들 때 환하게 웃는 아이의 사진이 필수적이라면, 아프리카의 고통을 말할 때 헐벗고 굶주린 아이의 사진도 필수적이다. 피디(P. D.) 제임스의 소설 <칠드런 오브 멘>이 그리듯,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없는 인류에게는 미래도 없다. 전세계적으로 아이는 그렇게 미래, 희망, 꿈을 드러내는 기호로 활용된다.
이러한 아이의 표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이에 대한 강력범죄는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고,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가난한 가정의 이야기 역시 국민적 동정을 자극한다.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강간 폭행한 중년 남자에 대해, 보육원에서의 아이 폭행 사건에 대해 대중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되돌아보라. 그런 흥분은 반대 방향에서도 일어난다. <오 마이 베이비>나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육아예능’에 등장하는 연예인 2세들에 대한 호감은 대표적이다. 송일국의 세 아들 쌍둥이와 추성훈의 딸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아이는 동정과 공분과 호감과 사랑을 자아내는 존재, 끊임없이 예찬되(어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 재현된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이런 예찬은 정치성이 탈각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육아예능’ 속 아이들에 대한 호감은 ‘귀엽고 예쁘다’는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고발 보도 프로그램에서의 아동 방치와 학대에 대한 동정과 분노 역시 마찬가지다. 호감이나 동정의 확장이 가닿는 최고치는 전자의 경우 ‘구매’이고(연예인 2세들을 등장시킨 광고), 후자의 경우 ‘자선’인데, 두 경우 모두 완벽하게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 곧 탈정치적인 차원일 때라야 가능하다.
아이라는 기호가 호감이나 동정을 넘어 ‘정치’의 영역에 들어올 때 예찬은 멈추고 논란이 시작된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의 아이들, 무상급식을 받지 못하는 경상남도의 아이들은 이 사회의 ‘예찬’이 가닿을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 진정 아이들이 ‘미래’이고 ‘꿈’이기에 예찬될 존재들이라면 세월호의 아이들에게, 경남의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대우를 할 수는 없다. 즉, 아이가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미래라는 말은, 오늘날, 오직 하나의 표어이자 제스처일 뿐인 것이다. 사회의 희망과 미래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주제는 이렇게 아이라는 기호를 통과하면서 완벽히 탈정치화된다. 아이에 대한 우리의 예찬, 우리의 애정고백이 일차원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위선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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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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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는 기호가 탈정치적으로 배치되는 방식은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한국 사회의 아이가 ‘청년’이 되면 이제 이 청년은 온갖 멘토링 비즈니스의 소비자이자 최저임금 노동자이자 대학과 기업의 호구가 된다. 청년의 신체, 감정, 지성, 에너지를 모조리 뽑아 쓰기 위해 대통령과 재벌 총수와 멘토들은 다시금 청년이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자 재산이라고 소리 높인다. 이런 구조에 청년이 반항하는 즉시, 이들은 순수를 배신한 ‘정치적’ 운동권으로 낙인찍혀 배제된다. 아이와 청년, 소위 우리 사회의 희망과 미래는 이런 식으로 철저히 소비되고 버려진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낱낱이 알면서도 개인적으로 적응하는 방식, 곧 내 ‘아이’를 승자로 기르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 구조를 온존시킨다. 그런 점에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며 외치는 ‘대한, 민국, 만세’는 한국에서 아이와 국가와 대중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구호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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