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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24 18:24 수정 : 2015.08.04 01:22

무대에 열 개의 크고작은 기둥들이 서 있다. 여덟 명의 한국과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남녀 배우들이 저마다 기둥 앞에 앉아 유리병을 안은 채 절규에 찬 침묵의 기도를 한다. 마음이 비통한 자들의 표정이 역력하다. 열 개의 기둥 가운데 가장 작은 기둥 앞에 앉은 여배우의 무언의 절규가 특히 절절하다. 배우들이 안고 있는 유리병에는 종이배들이 가득하다. 종이배에는 “나는 우리가 잃은 많은 것을 꿈꾸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호주 시인 주디스 라이트가 쓴 시 <홍수>의 한 구절이다. 여덟 명의 배우들은 공연 내내 한마디 대사 없이 혼신의 신체언어로 ‘진혼’의 무대를 연기한다.

위 퍼포먼스는 서울문화재단이 4·16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한 <델루즈: 물의 기억>이다. 델루즈(Deluge)라는 말은 영어로 ‘홍수’의 옛말이다. 2011년 2월 호주에 엄습한 대홍수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에서 호주 극단 렘 시어터가 초연한 공연이다. 이 공연을 원작으로 한 <델루즈: 물의 기억>은 국제협업을 통해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일종의 씻김굿의 무대다. 장중하면서도 애잔한 판소리 가락과 굿 장단에서 이 의미를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마음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애도의 무대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묻게 된다. 세월호 이후 기억투쟁의 중요성을 누구나 강조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 앞에서 문학은, 예술은, 무력했다. 맏상주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옆에서’ 함께 울고, 이 폐허를 증언하며, 국가-자본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생산하는 것이 어쩌면 문학과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고 최선일 것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3차 연장전>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예술행동도 그런 과정이었으리라. 나 또한 광장에서 열린 문학인 토론회에서 재난 상황에서 화를 피하는 집을 의미하는 ‘피화당’(避禍堂) 같은 곳은 없었으며, 국가와 자본에 맞서는 새로운 대항서사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추모를 위한 슬픔의 지리학을 넘어 분노의 정치경제학을 구현하는 것이 시적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의 기억’을 넘어 ‘불의 기억’이 필요하다.

결국 문학이, 예술이, 더 물어야 하는 질문은 우리는 왜 이러한 국가를 용인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대항서사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지난 4월13일 작고한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글쓰기는 이 점에 관한 한 뛰어난 모범이었다. 갈레아노는 1492년 콜럼버스가 “오늘부터 이 모든 것은 저 먼 곳의 군주에게 속한다”고 선언한 이후, 사랑이 경멸에 내몰리고 자신의 기억(역사)을 강탈당한 라틴아메리카의 진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의 대표작 <수탈된 대지>, <불의 기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이 연출하는 다성악의 향연이다. 연대기 형식으로 저 신화 시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른 <불의 기억>은 소위 문명화 사업과 자유세계 확대에 맞서서 자기 문제는 결국 자신만이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입증한 위대한 작품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1524년 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시인은 부는 바람에서 역사를 냄새 맡고, 강변의 조약돌에서 역사를 만지고, 입 속의 풀잎에서 역사를 맛보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슬픔을 곱씹는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세월호 1년을 맞아 망각에 저항하며 대항서사를 만드는 문학(예술)의 몫은 어쩌면 ‘문체’의 변화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체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몸을 바꾸고, 내 마음을 바꾸는 과정을 동반한다. 그 ‘괴로운’ 변신 과정에서 시인-시민이 탄생하고, 시민-시인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나는 ‘불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문학과 예술 작품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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