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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6 18:37 수정 : 2015.08.04 01:10

지난 일주일은 썰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표절 파문 이후 문학 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자주 나는 왜 문학을 하고 글을 쓰는가 자문자답한 시간이 있었던가. 사람들은 신경숙 작가의 표절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힐난성 질문을 자주 던졌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발가벗고 저잣거리에 나선 듯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문학은 ‘추문’이 된 것이다.

한국문학은 왜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나. 문학장을 형성하는 생태계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은 지금 와서 새삼스럽다. 이야기는 더 이상 성찰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환금성을 절대가치로 숭배하는 대형 출판사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오로지 ‘잘 팔리는’ 문화상품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은 출판시장과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이비 힐링을 권하는 시대 추세에 영합하는 상품미학이 권장되고 재촉되었으며, 저항과 불온성의 뇌관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감수성이 거세된 위로와 안식의 문화상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다양성의 가치가 훼손된 것이다. 그런 문학장에서 양산되는 작품을 읽고, 필사를 하며, 문학수업을 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 나는 절망한다. 자족적인 것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만, 자폐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재생을 위해 글쓰기의 자리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차라리 작품을 표절하지 말고, 작가의 삶을 ‘표절’하라고 말하고 싶다. 조지 오웰의 삶은 내가 가장 표절하고 싶은 작가의 표상이다. 그가 쓴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는가> 같은 에세이를 볼 때마다 조지 오웰의 치열한 삶과 글쓰기에 나는 자주 감동하곤 한다. 그런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삶-현실 텍스트는 언제나 작품보다 위대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작가들이 한국 문단에는 여럿 있다. 서성란의 <침대 없는 여자>와 이은선의 <발치카 No.9>는 ‘온몸으로’ 쓴 결실이다. 최근의 표절 사태가 애석한 것은 평소 ‘한국문학 따위는’ 읽지 않는 것을 교양인의 척도쯤으로 간주하며 사는 독자들에게 자기합리화의 알리바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표절 사태 이후를 어떻게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후속 논의와 결과에 따라 독자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뢰의 철회를 보낸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만만치 않다.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등 출판 3사가 문학의 사회적 성찰을 보여주는 공론장을 형성할 수 있을까. 계간지 가을호를 보면 알겠지만, 솔직히 말해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문학장에 대한 신뢰 자체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동네가 표절과 문학권력 문제를 제기한 평론가들에게 공개 좌담회를 제안한 형식과 내용을 보며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된다. 제 안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장자는 탈정(脫井)이라고 했다. 문학동네는 공개 좌담회 제안 이전에 사과 표명이 먼저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탈정은 아직 먼 일인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한국문학은 문학의 ‘문학성’ 자체가 의심받고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에 맞서서 한 줄의 시와 한 문장을 위해 불면과 번뇌의 시간을 보내는 작가들이 있다. 그런 작가들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결국 독자들의 몫이다. 우리가 문학책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국문학(장)을 믿어도 될까. 지금, 한국문학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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