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7.17 18:46
수정 : 2015.08.04 00:54
시는 무력하다. 국가와 자본의 무력 앞에서 시는 얼마나 무력하기 짝이 없는가. 시를 쓴다고 큰돈을 만질 수 있는가. 시를 읽는다고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지식이 되는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알 만한 나이인 중학생이라면 금세 눈치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를 쓰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다. 세상의 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기 드물게 어떤 시는 말의 힘에 매혹되는 강렬한 독서 경험을 하게 한다.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시의 그런 역능이야말로 ‘시의 힘’이라고 말한다.
최근 첫 시집을 낸 안주철과 박소란의 시를 읽었다. 두 시인의 시는 한국시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안주철의 <다음 생에 할 일들>과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은 ‘희미’하고 ‘희박’한 존재들에게 오롯이 바쳐진 ‘흉터’와도 같은 헌정시집이다. 두 시인의 음색과 음역은 당연히 다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시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구원이 아니고 ‘흉터’(박소란)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두 시인은 자신들의 시가 “위로가 스며들지 않는 모래 / 모래 알갱이”(안주철)처럼 ‘버석한’ 어떤 것으로 읽히기를 원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두 시인의 시에서 가짜 힐링 따위를 권유하고 재촉하려는 일체의 욕망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박소란은 “노래는 구원이 아니”고, “다만 흉터였으니”라고 쓰고 있으며, 안주철은 “위로해도 / 위로해도 / 위로가 닿지 않는 / 너무나 짧은 생애 위로”라는 말로 표현한다.
2002년에 등단해 13년 만에 첫 시집을 낸 안주철은 시에서 “비루한 내 수준. / 아슬아슬한 내 수준.”(<썩은 고기>)을 행간에 부려놓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표제작과 <꽃> 같은 작품이 특히 그렇다. 인공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생생한 직정(直情)의 언어로 세속의 거룩함을 연출한다. 왜 시인이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라고 썼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안주철의 시쓰기가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투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꿈이 지워질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뚫린다.”(<꿈을 지운다>)라는 표현을 보라. 삶의 붕괴 양상을 표현한 우리 시대의 한 형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박소란의 경우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그러니까 나는 /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라고 쓴 박소란의 표현은 모든 것을 끝없이 유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우수마발 같은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연대사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용산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시 <용산을 추억함>에서 독특한 어조로 사회적 삶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시를 쓴 것은 더 이상 헛된 희망 따위와 야합하지 않으며, 결국 ‘다음에’가 아니라 ‘이번에’ 지금 여기에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주소>)라는 표현에서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격렬한 정동을 행간에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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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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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무력하다. 그러나 좋은 시는 언제나 패배를 노래한다. 사회에 대한 개인의 승리를 운운하며 냉소주의를 부채질하는 이 시절에, 시를 쓰고 읽는다는 행위란 무엇인가. ‘다음 생’을 자꾸 들먹이는 화자 앞에서 아내가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안주철의 표제작에서 어떤 비밀을 엿보게 된다. 그것은 ‘이번 생’을 외면하고서는 제대로 사람 노릇 하며 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 시인의 좋은 시집을 읽은 경험이 어떻게 내 안에서 소용돌이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나는 다만 세상의 벽에 갇혀 질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는 것이 팍팍한 이 여름에, 이열치열의 시읽기를 권유한다. 내 안의 벽을 허물고, 세상의 벽과 다른 언어로 싸우는 상상력 혁명을 위하여.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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