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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24 20:18 수정 : 2015.08.04 00:53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피트 닥터 감독의 애니매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제목 그대로 ‘안팎을 뒤집어’ 보여준다. 여기서 뒤집혀지는 ‘안’은 인간의 뇌, 정확히는 뇌에 위치한 감정들이다. 영화는 라일리라는 11살 소녀의 삶과 그녀의 뇌 속에 있는 의인화된 감정들(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골자는 라일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감정들 간의 상호작용 혹은 권력투쟁으로, ‘기쁨’과 ‘슬픔’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행복만이 제일이라고 믿는 기쁨은 슬픔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슬픔은 쉽게 감정을 변모시키는 자신의 능력을 뻗치며 거기서 벗어난다. 갈등 끝에 기쁨은 슬픔에 푹 젖으면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랑(기쁨)과 파랑(슬픔)이 손을 잡음으로써 녹색의 감정이 탄생하는 장면은 이 깨달음을 나타낸다.

픽사를 비롯한 디즈니 애니매이션은 오늘날 가치의 변화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소수자, 약자, 소외된 자를 보듬으면서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강자의 도덕임을 조용히 설파한다. 빙봉의 ‘희생’이 기쁨을 탈출시키는 것이나 무서운 피에로의 기억이 제 때에 라일리를 깨우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잊혀지는 기억들, 잊고싶은 기억들도 나름의 긍정적 역할을 한다. 이 깨달음은 영화에서 성장서사로 그려진다. 11살에서 12살이 되며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게 된 라일리의 성장과 그녀의 뇌 속, 슬픔을 껴안는 기쁨의 성장은 하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 도덕적 성장은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말하는 ‘관용’을 환기시킨다. 서구제국의 통치전략인 관용은 화합과 동반이라는 제국의 문화적 가치에 동조하는 이들에게만 베풀어지는 도덕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로 호명되어 제거대상이 된다. 제국이 관용을 채택하는 이유는 근본주의자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는 이슬람국가나 북한 같이 서구 글로벌 질서에 저항하는 근본주의자가 없다. 기쁨을 제외한 슬픔, 버럭, 소심, 까칠은 모두가 ‘부정적’인 데도 이들은 서로를 돕는다. 큰 힘을 가진 슬픔이나 버럭도 근본주의자라기보다는 기쁨의 인정을 갈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관용의 글로벌 질서란 이런 모습 아닐까.

긍정과 부정이 힘을 합쳐 ‘라일리’라는 주체를 조화롭게 운영하는 이 영화의 세계관은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의 아이스하키장처럼 매끄럽기만 하다. 우리 모두가 몰두하는 스마트폰의 유리 화면과도 조응하는 이 매끄러움은, 그러나, 뭔가를 얼음장과 유리화면 아래로 묻어버린 매끄러움이다. 기쁨과 슬픔이 손을 잡고, 긍정과 부정이 협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조화가 ‘긍정’을 위해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기쁨을 유발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고, 버럭이 유용한 것은 그것이 유리창에 매달린 기쁨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들은 라일리의 ‘제대로 된’ 성장이라는 긍정에 봉사할 때 유의미한 것이다. 가출 직전에 라일리를 끝내 버스에서 내리게 만드는 이 힘, 신자유주의의 지식 IT 경제를 표상하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벤처창업자(후에 앱개발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을) 아빠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만드는 이 힘, 그리고 여기에 모든 감정들이 협력하는 영화의 서사는 쿠바를 받아들이면서 북한을 배제하는 미국과 그리스에게 기회를 주면서 강력히 구조조종하려는 유럽연합의 정책과 상통한다. 기존 체제에 근본주의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배제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그리하여 기존 체제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문화적 개방과 자유의 이미지로 덮어버리는 것. <인사이드 아웃>은 우리 내부를 뒤집어 보여주지만, 이것만은, 이러한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만은 뒤집지 못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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