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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1 18:40 수정 : 2015.08.21 18:40

그리고 비행기 한 대가 날아왔다. 70년 만에, 비행기는 헌법 첫 줄 사이로 내려앉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 전문이 그날 빛났다. 70년 전 C-47 수송기 바퀴가 처음 닿은 지점과 거의 동일한 국토의 한 지점에 광복군과 임시정부가 착륙했다.

1945년 8월18일 한국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는 오른쪽 겨느랑이 밑에 토미건을 낀 채 C-47 수송기에서 뛰어내렸다. 햇살이 따가웠다. 품에는 리볼버 권총이 들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수류탄을 차고 있었다. 광복군 이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도착한 네 명이었다. 장준하 기록 오후 2시18분, 미 전략정보국(OSS) 쪽 증언 오전 11시56분이었다. 제2경성비행장(여의도비행장)에는 제로센 20대를 포함해서 50여대의 비행기가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지 사흘이 지난 오후였지만 여전히 일본군은 건재했다. 8·15 이후 조선 민중의 봉기를 우려해 도리어 치안권을 강화한 상황이었다. 격납고(윤중중학교 근처) 앞에 내려선 이들 22명을 향해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비행기에 동승한 한국계 미군은 대위 함용준, 소위 정운수, 이등병 서상복이었다. 미군은 한국에 상륙하기 위해 한국계 OSS 대원을 운용중이었다.(1946년까지 80여명) 조국해방을 위해 1944년 말에 자원한 함용준 박사는 예일대를 졸업한 마흔이 넘은 중년이었다. 프린스턴대학원을 나온 서상복 또한 1906년생이었다. 실제 여의도에 도착한 한국인은 이들 셋을 포함해 7인이었다. 비행기가 중국을 벗어났을 때 조국의 바다 짙푸른 서해 물결에 이미 목숨 따위 흩어버리고 온 일곱 전사들이었다.

김구 주석이 정진대에 내린 명령은 광복군 이름으로 조국에 진입하라는 것이었다. 오직 죽음이 기다리는 이 작전에 광복군들은 다투어 자원했고 고르고 골라서 네 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미국 군사사절단(작전명 ‘독수리’), 단장은 중국 OSS 부책임자 버드 중령이었다. 미군의 목적은 한국 내 연합군 포로의 안전 확인과 지원이었다. 경성, 인천, 흥남 세 곳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광복군 정진대의 목적은 사뭇 달랐다. 여의도비행장을 벗어나 서울 중심부로 들어가 민족지도자들과 접촉해서 일제를 무력으로 내쫓는 행동을 감행하거나 현장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양측 사이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든 그날 밤, 여의도비행장 경비사령관 시부자와 대좌와 우에다 히데오 소좌 등이 기린맥주와 일본 술 사케를 들고 미군과 광복군 정진대를 찾아왔다. 22명은 연료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일본군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익을 무렵 시부자와가 무릎을 꿇고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에게 술을 권했다. 항복주였다. 장준하는 난생처음 술을 마셨다. 일본군이 광복군에게 항복의 예를 취한 오직 한 번의 술잔이었다.

C-47기는 세 달 뒤인 11월23일 환국하는 임시정부 요인 15명을 태우고 환영객 한 명 없는 쓸쓸한 김포비행장에 또 날아왔다. 활동지가 망명지 중국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임정과 광복군은 기념공간이 거의 없었다. 70년 만에야 거처가 마련된 여의도공원에 같은 날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다시 항복주를 올렸다. 이름조차 기록,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숱한 항일투사들을 위한 초혼이기도 했다. 이들 대부분에게는 고단한 애국심 말고는 다른 복은 주지 않은 조국이었다. 제문은 짧았지만 현 권력이 건국 67년 운운하는 광복 70주년이었기에 더욱 비감하였다.

서해성 소설가
당신들이 우리 헌법 첫 줄이옵니다. 오늘 종이 위에 술 한 잔을 뿌립니다. 흠향하소서.

비행기는 그 사이로 날아왔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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