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 시절 한국작가회의에 ‘저항의 글쓰기 실천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다. 2010년 1월20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광우병대책회의 촛불시위에 참여한 것과 관련해 한국작가회의를 불법폭력시위 단체로 규정하고, 이미 확정된 보조금 지급의 전제조건으로 향후 집회 불참을 서약하는 ‘확인서’를 요구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야당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이 위원장을 맡아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작가들은 4대강 살리기라는 허울 아래 아름다운 조국의 강과 산하가 파괴되는 것에 아파하며 현장을 누비며 저항하고 고발하는 글쓰기를 했다.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우자”라는 신동엽 시인의 표현을 딴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때의 활동이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은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지금 정부 와서도 행정의 ‘갑질’이 여전하다는 인식을 현장 예술인들은 공유하고 있다. 이제는 지배 권력의 그런 규칙과 관습이 하나의 ‘상식’처럼 작동한다는 점이다. 예술 현장에 하달되는 지침 행정은 갈수록 섬세해지고 있고, 공무원들 마음의 관료주의 또한 더 견고해진 것 같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정책의지는 보이지 않고, ‘추진’하려는 건축의지만 보이는 문화예술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이 행정이다’라는 행정의 철학은 관료 조직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저항이 필요한 이유가 이 지점에 있을 법하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창조와 저항의 거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창조와 저항의 거점은 자임(自任)한다고 하여 스스로 ‘거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백영서 편집주간이 쓴 권두언을 보며 “한때의 저항이 저항 주식회사로 화려하게 변신했다”고 진단한 캐나다 정치학자 피터 도베르뉴와 제네비브 르바론의 주장을 떠올린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나는 1960~1980년대 <창작과비평>이 창조와 저항의 거점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판을 뒤흔든 최근의 사건 이후 보여준 행보는 운동의 기업화 현상을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남들이 세워주는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자임할 때 생긴다는 점이다. 지난 8월22~23일 성남시 구미동 하수종말처리장과 오리공원 일대에서 열린 ‘저항예술제’는 예술행동과 문화실천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성남시 후원으로 민예총이 주관해 십년째 버려진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열린 저항예술제는 난장 형식의 예술제였다. 종이 상자를 쌓아올려 전시 공간을 연출한 점이 퍽 인상적이었다. 비주류사진관의 작업을 비롯해 삼평리 프로젝트팀, ‘우리가 키운 괴조’ 같은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지난해와 올해 행사를 참관하며 느낀 점은 저항예술제가 전술미디어를 활용해 패러디, 풍자, 해학, 콜라주 등의 표현 방식으로 문화적 저항을 보여주었으나, ‘적색’ 하위문화 이상의 미학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극혐’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한 날것의 예술작품들은 ‘박근혜 정부는 후지다’는 메시지 전달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작품의 ‘상투성’에 대한 저항으로서 제 의미를 얼마나 담아냈는지 모르겠다. 정치적 올바름이 미학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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